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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예쁜 철쭉숲을 두향과 거닐었으면…(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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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8)


[千日野話]예쁜 철쭉숲을 두향과 거닐었으면…(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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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향이 죽은 뒤, 그녀의 주검을 수습해준 이는 이지함이었다. 그는 강물에서 두향을 건져내 장례를 지내고 강선대 옆에 묻었다. 장례를 치를 때는 형 이지번도 함께 왔다. 의매(義媒)로 정한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 지함은 해마다 5월에 강선대 부근 두향의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지함의 이런 뜻은 이산해에게로 이어져, 집안 대대로 기일을 엄수하여 예를 갖췄다. 퇴계선생 연표를 꼼꼼히 정리해낸 정석태 부산대 교수는 조선말까지 이산해의 집안에서 두향 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을 찾아내기도 했다.


풍기군수로 이임한 이황은 1549년 4월에 소백산을 여행한다. 그 봄날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개어 산빛이 멱감은 듯 청신한 날, 백운동서원에 가서 학생들을 지도하고나서 이튿날 진사 민서경, 그의 아들 민응기와 함께 산에 오른다. 그가 등산을 계획한 것은 전임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곳에 올라 멋진 유산록(遊山錄)을 남겼는데, 백운동서원에서 이 글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사람 종수가 암자에서 내려와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황은 죽계 계곡을 따라 올라 주세붕이 백운대라 이름붙은 곳에 앉아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는 여울을 내려다본다. 스님들이 주세붕의 산행 때 쓰던 간이가마를 가져왔는데 병약한 이황군수가 지칠 때면 태웠다. 그는 자개봉을 지나 국망봉까지 올랐다. 마침 운무가 자욱하여 한양 쪽의 용문산은 보이지 않았고 서남쪽에 월악산이 희미하다. 동쪽으로는 태백산, 청량산이 가물거리고 남쪽으로는 학가산, 팔공산이 아스라하다. 산정 가는 길엔 마침 철쭉이 숲을 이뤄 꽃빛이 흐드러졌다. 그는 축륭(봄의 신)의 잔치에 초대받은 것 같았다고 감회를 털어놓았다. 그 산정에서 멀리 단양쪽을 바라보며 두향을 떠올렸을까. 아름다운 철쭉숲을 그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거닐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은 멀어지고 그리움은 솟아오른다.

안동의 도산면에도 국망봉이 있다. 이곳은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위해 제사를 30년간 지낸 곳이다. 그에게는 이름에 대한 감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에선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말을 했다. "산정에는 기온이 낮고 사시사철 세찬 바람이 불어서 나무들이 모두 동쪽으로 누웠고 가지들이 굽어 뒤틀렸으며 키가 작다. 1년내내 자라야 손가락 마디만큼 자라는데 억척으로 버티어 모진 풍상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나무도 제 환경에 따라 이렇게 격하게 싸우며 체형을 바꿔 살아내는데 사람인들 어찌 다르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있는 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 지금 이황에겐 그런 투지가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그의 3박4일 여정은, 초암골짜기로 올라 석륜사(국망봉 밑에 절터가 남아있다)와 국망봉, 비로사로 돌아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 해 9월에 병(病)이 심해져 감사에게 사표를 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에는 조정에서 백운동서원의 편액을 내려주도록 청하였다. 백운동은 고려 유학자 안향의 옛집터로 주세붕이 군수가 된 뒤 서원을 세웠다. 풍기군수 이황의 청은 받아들여져, 조정에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내렸다. 세 차례에 걸쳐 사표를 냈으나 응답이 없자, 그는 임지를 떠나 고향으로 갔다. 이듬해 1월에 함부로 임지를 벗어난 것을 이유로 직첩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그런 몸부림 끝에 안동의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고 은거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넷째형 이해가 귀양길에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해 8월이었다. 정치에 대한 환멸과 삶의 피로감이 급습하던 시절이었다. 이황은 오직 후학을 가르치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벼슬 없이 1551년 한해를 꼬박 보낸 그는 이듬해 1월에 이런 시를 쓴다.


黃卷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황권중간대성현 허명일실좌초연)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매창우견춘소식 막향요금탄절현)


책을 읽는 사이, 옛어른을 대하니
텅 비어 밝은 방안, 세상을 벗은 듯 앉았다
창가의 매화를 다시 보니 봄이 온줄 알겠구나
거문고 바라보며 들어줄 벗 없음을 탄식하지 말라


<계속>


▶빈섬의 스토리텔링 '千日野話' 전체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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