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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봄빛 좋은 날을 저버렸다 미워말라(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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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9)

[千日野話]봄빛 좋은 날을 저버렸다 미워말라(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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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날에 한가로이 앉은 이황은 다시 핀 매화를 보며 두향을 생각했다. 그 거문고 소리가 귀에 들릴 듯하다. 그는 두향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홀로 쓸쓸히 지내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 사람도 창밖의 매화를 바라보고 있겠지. 내가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어도 매화를 바라보는 것은 같으니, 마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도다. 내 귀가 먼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자네 귀가 내 시 읊는 소리를 들으니, 일신(一身)의 부재(不在)에 고통받지 말기를.

1565년 무렵 도산구곡가 시조 열두 수를 짓고 그 취지를 설명하는 글을 썼다. 그중에 제4편은 두향을 향한 마음을 살짝 담았다.


유란이 재곡하니 자연히 듣기 좋아
백운이 재산하니 자연히 보기 좋아
이 중에 피미일인을 더욱 잊지 못하리라

유란이 골짜기에 있으니(在谷) 자연히 듣기가 좋다. 유란(幽蘭)은 검은 빛이 감도는 난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거문고의 곡으로 유명한 유란곡(幽蘭曲)을 상징하기도 한다. 두향은 거문고에 뛰어나 퇴계가 금보가(琴譜歌)까지 지어주지 않았던가. 난초가 듣기 좋다는 말은, 난초의 향기가 워낙 그윽하여 귀로 맡는다는 의미이다. 즉 문향(聞香)의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향기를 듣는다는 말은, 이미 두향이 단양의 제8경이었던 강선대를 '잠대문향(潛臺聞香)'이라 표현한 바 있다. 흰 구름이 산에 있으니(在山) 보기가 좋다. 이 말은 도연명의 시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춘수만사택 하운다기봉)'의 구절에서 빌렸다. 즉 봄물은 사방의 연못에 꽉 찼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가득 걸렸다. 봄과 여름의 풍경을 읊은 것이지만, 앞의 구절은 여성의 성적인 기운이 무르익은 것을 표현하고 뒤의 구절은 남성의 성적인 힘이 충만한 것을 가리키는 데에 쓰이기도 한다. 음양의 생기 있는 조화를 표현한 대구라 할 수 있다. 유란과 백운은 바로 운우지정을 나눈 두향과 퇴계이다. 그 사랑을 자연(自然ㆍ스스로 그러함)의 감정으로 표현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 퇴계는 피미일인(彼美一人)이란 말을 넣어, 그리운 감정을 아로새겨 놓았다. 물론 정철의 사미인곡처럼 미인은 왕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퇴계가 말한 '저 아름다운 한 사람'은 유란곡을 연주하는 두향일 수밖에 없다.


1569년 퇴계 나이 69세 때, 그는 두향이 준 매화를 바라보며 이런 시를 쓴다.


籠榮聲利豈君宜 白首趨塵隔歲思(총영성리기군의 백수추진격세사)
此日幸蒙天許退 況來當我發春時(차일행몽천허퇴 황래당아발춘시)


총애와 번영, 명성과 이익이 어찌 그대에게 맞겠나이까
흙을 밀어낸 하얀 꽃송이가 해 넘기며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다행스런 바보에게 하늘이 은퇴를 허락했군요
더욱이 이 몸에 봄이 돋는 무렵에 오셨군요


이 시는 '매화가 주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으로 썼다. 매화는 두향이다. 꿈에도 그리운 그 여인이 이황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임금이 총애하고 부귀를 누리고 이름을 얻고 뭔가를 챙기는 것이 어찌 나으리의 삶에 맞겠습니까. 돋아오른 백매가 그 추운 날들을 견디며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벼슬을 마다 않고 달려나가셨는데 이렇게 조정에서 물러남을 허락해주니 정말 잘된 일이십니다. 거기다가 제가 꽃을 매다는 시절에 오셨으니, 다시 사랑을 나눠야겠네요.


非緣和鼎得君宜 酷愛淸芬自詠思(비연화정득군의 혹애청분자영사)
今我已能來赴約 不應嫌我負明時(금아이능내부약 불응혐아부명시)


이 시는 '주인이 매화에게 답함'이라는 제목으로 쓴 것이다.


인연도 없는 재상이 되어 왕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그대에게 맞겠는가
맑은 향기를 몹시도 사랑하여 스스로 노래하며 생각했도다
내가 돌아오기로 한 약속을 이제 지켰으니
봄빛 좋은 날들을 저버렸다고 날 미워하진 말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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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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