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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소세지가 오이지를 만나 소세지를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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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소세지가 오이지를 만나 소세지를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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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지가 오이지를 만나 소세지와 지지지를 낳았다.'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진원지는 혈액형이다. 얼마 전 만난 A 그룹 임원이 웃자고 꺼낸 '혈액형 식별법'을 필자의 식솔에 적용하니 해괴망측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A 임원의 말을 빌리면 A형은 소세지, B형은 오이지, O형은 단무지, AB형은 지지지다.


각각을 풀이하면 이렇다. 소세지는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맞고. 오이지는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맞고. 단무지는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맞고. 지지지는 지×맞고, 지×맞고, 지×맞고. 이런 해석이 얼마나 과학적이냐는 둘째치고 술자리 안주감으로는 나무랄게 없다는데 일부 공감한다. A 임원이 간만의 만남에서 혈액형 식별법을 꺼낸 것도 그래서다. 타인(필자)에 대한 친밀감의 표현이랄까.

'혈액'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따분하기 그지없다. "적혈구 표면에 단백질, 당단백질 그리고 당지질의 세포들로 이뤄져 있고, A형과 B형이 혈액형의 기본이고 O형과 AB형은 A형과 B형의 조합이며, O형만 나머지 모두에게 수혈을 할 수 있다."


행간을 아무리 뒤져도 혈액형과 성격의 인과관계는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혈액형은 개인의 성향과 무관하다. 그러니 혈액형 식별법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소설(웃자고 한 얘기를)을 다큐(사실처럼)로 인식하는 꼴이다.

소설을 다큐화하려는 시도는 일본이 특히 심하다. 혈액형 사랑학, 혈액형 인간학, 혈액형 건강학 등 별의별 학문이 날뛴다. 혈액형이 성격과 기질을 반영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또 하나의 신앙이다. 입사 지원서에는 혈액형 란이 있고, 혈액형에 따라 당락이 결정나는 경우도 숱하다. 반면 서양인들은 자기 혈액형이 뭔지도 모를 뿐더러 궁금해하지도 않는다(고(故)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자신이 O형이라는 것을 건강이 나빠졌을 때 알았을 것이다).


성격과 기질을 가장 잘 안다는 신경정신과 박사들이 보면 혈액형 식별법은 '소가 웃을 일'이다. 점쟁이들의 말이 잘 들어맞는다고 믿는(또는 믿으려는) '바넘효과'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혈액형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얘기를 들으면 소처럼 웃고 말면 그만이지만, 한 가지가 켕긴다.


소세지, 단무지, 오이지, 지지지 모두 '지'로 끝난다는 사실. 인간의 타고난 이기심을 뜻하는 걸까. 소설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지만, 소설에도 작은 교훈은 있는 법. 혈액형이 무엇이든 인성이나 품성이 중요하다는 가르침 말이다. 그래서 되뇌여본다. '오늘 하루도 덜 지×맞게'.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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