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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TV사회자와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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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와 TV방송 진행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자신이 바로 뒤에 할 일을 알려준다.


치과의사는 말한다. "바람입니다." "물입니다." "솜입니다." TV방송 사회자는 말한다.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제가 이 차를 직접 타보겠습니다." "이곳에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치과의사는 자신이 할 치료 행위와 함께 환자가 처할 상황도 미리 말해준다. "마취주사입니다. 따끔합니다." "(드릴입니다) 요란합니다. 좀 시큰할 겁니다." 치과의사가 하는 말은 우리를 안심하게 하거나 대비하도록 한다.


그러나 TV방송 진행자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설명을 하는 것은 전혀 고맙지 않다. 소설가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봉가족(族)'에 빗대 TV방송 사회자의 화법을 패러디한다.

그는 "스발바르 제도 학술원에서 몇 해 동안 봉가족을 연구하라고 나를 파견했을 때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며 얘기를 시작한다. "봉가인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면 그는 '자, 제가 문을 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문을 열고 인사를 한다."


에코는 봉가족이 '미지의 땅'과 '행복한 군도' 사이에서 하나의 문명을 활짝 꽃피우고 있다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방식을 못마땅해한다. "그들은 전제와 암시, 함축의 기법을 모른다"고 평한다. 이 패러디는 그의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에 실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지문(地文) 같은 말을 TV방송 진행자가 하게 된 배경은 뭘까? 이는 TV가 라디오에서 '진화'한 뒤에도 남은 흔적인지 모른다. 장면을 보지 못하는 청취자들에게 정보를 충실히 제공하려고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스타일이 TV에 이어진 것일 수 있다.


TV방송 진행자의 '봉가족 화법'에는 다른 의도가 숨어있을 법도 하다. 시청자가 방송에 동조되도록 하는 것이다. 시각과 함께 청각도 끌어들여 '공감각적인 시청'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시청자가 진행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느끼고 즐기게 하는 것이다. 시트콤 웃음소리나 토크쇼 자막과 비슷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TV방송에서 내보내는 대로 보고 듣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를 내려놓는다. 반면 눈을 감으면 더 많은 것을 상상 속에서 보게 된다. 이 잡념도 치과에서 눈을 감고 치료를 받는 동안 떠올랐다. 상상력을 키우는 데에는 TV방송 사회자보다 치과의사가 더 도움이 된다.






백우진 국제부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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