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 부인 시절 쓴 책의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아프리카의 오랜 격언이다. 아이 한 명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역량이 총동원돼야 한다는 것을, 아이가 성장하는 데는 100가지, 1000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그 100가지, 1000가지에는 일단 재화와 물리적 제도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밥이 필요했고 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무가 햇볕과 물을 섭취할 때 거기에서 비단 영양분만이 아니라 대기와 땅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진기를 함께 받아들이듯이 아이는 마을의 기억과 역사,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기질 덩어리가 아니라 소우주로서의 인간으로 자라난다.
조직체도 다르지 않다. 하나의 조직이 잘 성장하고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은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일단 구성원과 자금, 그리고 운영을 위한 규칙과 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조직은 규정을 만들고 매뉴얼을 만든다. 그것이 제도와 형식, 체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많은 조직들이 빠지는 오류는 그 형식과 제도를 운용하는 지혜가 함께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매우 효율적이지만 효과적이지는 않은' 조직들이 나오는 이유의 하나가 거기에 있다.
이번 달로 3주기를 맞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줬던 교훈도 바로 그것이었다.후쿠시마에는 원전 운영에 대한 모든 것이 상세한 매뉴얼로 정리가 돼 있었지만 매뉴얼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매뉴얼의 매뉴얼'은 없었다. 정작 위기상황에서는 무력했던 당시의 참극은 매뉴얼 만능주의의 함정을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많이 얘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매뉴얼 무용론으로 빠져서는 곤란하다. 매뉴얼은 일종의 근대화,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화해서, 매뉴얼의 부재를 전(前)근대라고 할 수 있다면 매뉴얼 사회는 근대를, 매뉴얼 이상의 시스템은 탈근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탈(脫) 매뉴얼 이전에 필요한 것은 매뉴얼이 일단 정교하게 마련돼 있지 않은 건 아닌지, 혹은 매뉴얼과 제도가 갖춰져 있더라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부터 살피는 것이다. 넓게는 한국 사회, 좁게는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조직에 대해 그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후쿠시마 사태로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길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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