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아메리카가 서식지인 비버는 몸체(길이 60∼70cm, 꼬리길이 33∼44cm, 몸무게 20∼27㎏)가 작다. 개울이나 작은 강, 숲속 호수 주위에 댐을 쌓고 그 안에서 암수 한 쌍이 새끼들과 한 가족을 이루어 산다. 부지런하고 평화로운 동물로 일찍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비버는 사냥군에 쫓겨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자신의 고환을 뜯어내주고 생명을 구한다는 재미있는 이솝우화도 있다. 비버의 고환이 독을제거하고 생리불순 등에 도움이되고, 짝짓기를 할 때 분비하는 해리향(castreum)이라는 물질도 고급 향수의 재료나 약재로 쓰인다고 했다.
14세기 비버 털로 만든 모자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유럽전역에 비버 바람이 일었다. 유럽의 비버는 무자비한 도륙으로 사라져 갔고, 그 가죽은 양가죽보다 120배나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귀한 몸이 된 비버 햇은 유산상속 목록에도 올랐다. 1732년 영국은 식민지의 모자 생산자들이 비버 햇을 식민지 밖으로 팔지 못하도록 하는 조례(Hat Act)까지 발표했을 정도였다. 장장 4세기가 넘는 유행이었다.
중세말경에는 서유럽에서 비버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사라져가는 비버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동유럽과 시베리아를 뒤지고 북아메리카까지 쫓아갔다. 비버가 인간들의 북아메리카 탐험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었다. 비버가 세계를 움직인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주인이던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원하는 비버 가죽을 주고 솥, 손도끼, 총, 화약 등 새로운 물품들과 교환하는 재미에 맛 들였다. 비버와 친구하며 뒤처진 시대를 살던 그들이 비버를 배반한 대가로 생활양태가 바뀌면서 그 쪽 비버도 멸종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이었을까. 1797년, 런던에서 모자 점을 하던 John Hetherington이 실크 햇이라는 새로운 모자를 만들어내었다. 비싼 비버가 아닌 실크를 사용해도 되었다. 이어 전 유럽에 퍼졌다. 도륙이 멈추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3ㆍ1절을 전후해 독도의 '강치'에 대한 기사가 자주 우리를 아프게 한다. 20세기 초까지 '백령도는 물범이, 독도는 강치가 지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치의 천국이었던 것 같다. 강치는 몸길이 2.5m 내외의 물개과(Otariidae)에 속한다. 껍질은 최고급 가죽, 피하지방은 기름 그리고 살과 뼈는 비료로 활용할 수 있어, 한 마리 값이 당시 황소 10마리에 필적했다고 한다.
비극의 시작은 한 일본인이 어느 날 독도에서 엄청난 숫자의 강치를 잡아 떼돈을 벌면서였다. 구한말 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에 독도 어업권 독점과 함께 독도를 아예 일본 영토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 이 나라의 주권행사가 어려운 틈을 타 일본은 독도를 자국 영토에 포함 시켜버렸다. 그것을 근거로 오늘날 독도가 자기의 땅이라고 뻔뻔한 주장까지 한다고 했다. 독도 강치는 무자비하게 남획되었고,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일본도 멸종을 선언했다. '독도 강치'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없다. 근래 들어 '강치복원'이 정부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유행에 눈이 어두워 멸종의 위기에 몰렸던 비버는 그래도 지구상에 남아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나, 주인을 잘못 만나 멸종된 우리의 강치는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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