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3일 오후 소공동 한국은행 별관. 올드보이가 핑크색 타이를 매고 돌아와 활짝 웃었다. 신임 한은 총재 후보자 이주열 전 부총재다.
2년 전 김중수 현 총재와 등지며 조직을 떠났던 그는 금융사 고문역으로 물러나 때를 기다렸다. 인사청문회가 남았지만, 무릎 다친 아들의 병역 문제 외엔 크게 걸릴만한 게 없어 보인다. 시장은 경계하고, 전문가는 반긴다. 존재감도 확인됐다.
청와대는 새 총재 후보 인선 배경에 이례적으로 '겸손'이라는 단어를 썼다. 자부심의 아이콘인 현 총재를 고려하면, '이주열'이라는 이름이 '김중수 지우기'의 다른 말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부총재를 끝으로 조직을 떠나던 때 이 신임 총재 후보는 "60년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되고 있다"고 했다. 김 총재의 파격 인사가 조직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훼손한다는 외침이었다. "글로벌과 개혁의 흐름에, 오랜 기간 힘들여 쌓아 온 과거의 평판이 외면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도 말했다. 많은 직원들이 떠나는 그와 함께 울었다.
그랬던 그의 귀환에 한은은 축제 분위기다. 엎드려 숨죽였던 많은 사람들이 곧 내 세상이 올 것처럼 들떠있다. 후보 지명 직후엔 임명도 전인 총재 후보를 위해 떠들썩한 상견례 자리를 만들었다. 전례를 찾기 어렵다. 반면 한켠에선 이른바 '중수 키즈'들이 떨고 있다. 인사태풍으로 때 아닌 '봄 낙엽' 신세가 될까 벌써부터 뒷말이 무성하다.
만사에 시큰둥한 한은이 모처럼 활기를 되찾은 건 반길 일이다. 하지만 이주열의 귀환이 김중수 시대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건 자해(自害)다. 몇 번의 인사를 거치며 갈라질대로 갈라진 조직이 다시 뒤틀린다면, 이 신임 총재 후보가 말한 "이 시점,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할 한은의 역할"은 저만치 멀어진다. 거칠었지만, 김 총재의 개혁들이 정체된 한은의 발전에 비료가 됐으리라는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다행히 이 신임 총재 후보는 무용한 희생을 피할 생각인 것 같다. "잊어버릴 것은 잊어야 한다"는 말로 누군가 기대했을 인사태풍은 없을 것임을 못박았다.
수장은 'CEO 엔돌핀'이 나오는 자리라고들 한다. 착착 나열한 아랫사람들을 보면 격무에도 팔팔하게 뛸 짜릿함을 느낀다는 얘기다. 이 감정을 지탱하는 건 생사여탈을 가르는 힘, 즉 인사권이다. 새 시대의 한은 총재에겐 휘두를 수 있는 칼을 휘두르지 않을 때 나오는 권위, 그래서 파생되는 무게감이 필요하다.
박연미 기자 ch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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