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본드걸이 성숙한 여인이 되어 돌아왔다. 4년 전 한쪽 어깨에 걸친 언밸런스 의상을 입고 관객을 도발하던 그는 아련한 그리움을 노래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적셨다.
'피겨 여왕' 김연아(24)가 20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기술점수(TES·39.03점)와 예술점수(PCS·35.89점) 합계 74.92점을 받아 1위에 올랐다. 김연아가 받은 점수는 이번 시즌 여자 쇼트 최고기록이다.
쇼트 음악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에 맞춘 스케이팅은 물 흐르듯 유려했다. 고난도의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부터 트리플 플립, 더블 악셀까지 한 치 오차도 없었다. 김연아의 무대가 끝나자 관중석은 챔피언의 귀환을 환호했다.
그러나 안심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2위와의 차가 0.28점에 불과하다. 개최국 러시아의 복병 아델리나 소트니코바(18)가 74.64점으로 바짝 쫓고 있고, 캐롤리나 코스트너(27·이탈리아·74.12점)도 예상 외로 선전했다.
금메달을 결정지을 프리프로그램은 20일 오후 11시에 시작한다. 김연아의 올림픽 2연속 우승을 향한 최후의 관문이자 여왕의 고별 무대다.
◇ 실전에 강한 여왕, 첫 점프로 제압 = 같은 조에 속한 다섯 명의 선수들과 함께 몸을 푸는 '웜업'(warm-up)시간. 김연아는 긴장한 듯 점프를 제대로 뛰지 못했다. 도약하려다 포기하거나 1회전에 그치는 점프가 여러 차례 나왔다. 김연아 스스로도 "경기 시작 직전까지 점프에 자신감이 하나도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여왕은 실전에 강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연기에 몰입했다. 그리고 첫 점프.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순간, 김연아는 빠른 속도로 후진해 트리플 러츠를 뛰어 올랐다. 언제나처럼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 착지한 뒤 이어진 트리플 토 루프까지 완벽하게 뛰었다. 관중들은 참았던 함성을 터뜨렸다.
자신감을 찾은 김연아는 점수를 차곡 쌓아갔다. '명품'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로 가산점 1.5점을 포함해 11.60점을 챙겼다. 전체 기술점수(39.03점)의 30%에 해당하는 점수다. 이후 김연아는 트리플 플립과 더블 악셀에서도 가산점을 1점 이상씩 벌었다. 마지막 점프(더블 악셀)를 뛰곤 '다 해냈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탄탄한 기술 속에 예술성은 더욱 빛났다. 스텝과 스핀은 쇼트 음악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의 애잔한 선율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아름다운 표정과 몸놀림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 모든 감동이 예술점수(PCS)로 환산됐다. 김연아는 곡 해석과 퍼포먼스, 스케이팅 스킬 등 3항목에서 9점대를 받으며 35.89점을 기록했다. 세계기록(쇼트 78.50, 프리 150.06, 합계 228.56점)을 작성한 밴쿠버 때보다 더 높았다.
◇ 아쉬운 판정, 그리고 홈 텃세 = 0.28점. 소트니코바가 '클린'연기를 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1위 김연아와의 점수 차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적었다.
가산점을 보면 의문이 풀린다. 소트니코바는 일곱 가지 규정요소(점프3·스핀3·스텝)에서 가산점을 모두 8.66점 받았다. 트리플 콤비네이션(트리플 토 루프+트리플 토 루프)은 첫 점프가 약간 불안했지만 1.6점의 가산점을 챙겼다. 반면 김연아는 항상 2점 정도 받던 첫 점프의 가산점이 1.5점으로 내려앉았다. 가산점의 총 합도 7.6점으로 소트니코바보다 낮다. 개최국 러시아 선수인 소트니코바가 홈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고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팀 경기에서 맹활약해 기대를 모았던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러시아·5위·65.23점)도 첫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잘못된 에지를 사용했지만 심판들은 감점하지 않았다.
◇ 프리스케이팅, 관건은 '체력'= 쇼트에서 박빙의 결과가 나온 만큼 시선은 프리 스케이팅으로 쏠리고 있다. 김연아가 올림픽 2연속 우승을 하려면 체력이 관건이다. 프리스케이팅은 4분 10초 동안 일곱 번의 점프 등 열두 가지 기술 요소를 수행한다. '클린 연기'를 위해서는 경기 막판까지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김연아는 지난 1월 국내선수권대회에서도 막바지 체력이 떨어져 더블 악셀 점프를 싱글로 줄였다. 더구나 쇼트와 프리 사이에 하루를 쉬었던 밴쿠버 때와 달리 이틀 새 열리는 이번 대회에서는 체력을 회복할 시간의 여유가 없다.
그래도 김연아에겐 경험에서 우러나는 노련미가 있다. 또 누구보다 승부근성이 강하다. 여왕을 믿어보자. 김연아는 마지막 탱고(프리 프로그램 '아디오스 노니노')를 출 준비를 마쳤다.
손애성 객원기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