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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매화향기를 남기고 떠난 아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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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


[千日野話]매화향기를 남기고 떠난 아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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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향은 거문고를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퇴계는 가만히 술을 따른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두향은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을 음미하듯 머뭇머뭇 마셨다. 정적을 깬 것은 퇴계였다.


"너의 옛일을 얘기하는 것이 불편하여 그러느냐. 그렇다면, 말을 아껴도 되느니라."

그러면서 그녀를 향해 편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두향이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제가 나으리를 모시고자 하는 뜻은, 일생의 소원 같은 것입니다. 한 나라의 언관(言官)을 지낸 큰 그림자와 유학자로서의 비상한 성취만으로도, 제게 곁을 주시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광이지요. 하오나 미천한 제게는 나으리의 고결한 취향이 더욱 가슴을 뛰게 합니다. 혹애매(惑愛梅)로 이름이 높은 일세의 선비를 이렇듯 마주 앉아 대하며 시와 현금(玄琴)을 나누니 이보다 더한 향기로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고마움에 백에 하나라도 갚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주저하고 사양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추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제 아비는 고을의 외아전(外衙前)이었다고 하는데, 어쩌다 시골 여인 하나를 범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 소박맞고 친정 부근에서 홀로 살며, 매화밭을 꾸리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여 묵매(墨梅)를 치는 일을 큰 즐거움으로 삼던 이였습니다."


두향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끊었다가 나즉히 다시 말을 잇는다.


"둘의 몸사랑은 그리 길지 않았던지 저를 낳은 뒤로는 아비가 어쩐 일인지 발길을 끊었습니다. 제게 아비의 기억은 거의 없지만, 그에게서 향그런 매실 향기가 떠돌았던 듯합니다. 순전히 저의 착각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세 살이 되던 해, 어미는 역병(疫病)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아기는 어미의 친정 노모가 젖동냥을 하며 키웠다 합니다. 그러다 할머니마저 큰 병을 얻고 말았는데, 사경을 헤매면서도 동네사람에게 애걸하기를, 아기인 저를 관청 앞에 포대에 싸서 놓아달라고 했다 합니다. 혹여 그 아비가 보고는 동정심을 일으켜 거둬주지 않을까 하여서였을 겁니다."


"저런…"


퇴계가 혀를 찼다. 두향은 목이 잠겼다. 술을 받아 넘긴 뒤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비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이 든 퇴기 매향(梅香)이 데려와 저를 지금껏 키워주었지요. 저는 어미도 잃고 아비를 아는 혈육도 다 잃었는지라, 어미가 남겨둔 작은 매원(梅園)에 마음을 의지하며 자랐습니다. 큰 둥치 매화목을 아비로 삼고 그 옆에 가만히 고개 기울인 매화목을 어미로 생각하며 살아왔더이다. 관의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지만, 아직도 그 매원에 둔 마음을 거둬오지 못하고 분매를 가꾸는 일이 못고칠 병처럼 되었습니다. 가엾은 어미의 넋이 제게로 건너온 것인지 매화만 보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고, 소일거리로 친 묵매도 벽장에 가득 쌓였더이다."


"참으로 가련하면서도 기이한 이야기로다. 그렇다면 그 아비의 행방은 여전히 모른다는 말이냐?"


"그의 무심을 탓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이미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매화 향기가 떠도는 아비는, 진짜 매화나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두향아. 너는 매화의 딸이다. 매화목이 낳은 아름다운 아이다. 온몸에 그윽한 기운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렷다. 나는 매화를 아내라고 말하던 북송의 임포(林逋, 967~1028)가 되어 그 향기를 잠시 품어보고자 하노라."


"황송하옵니다. 나으리."


퇴계가 다시 술잔을 건네자 가만히 받아마신 두향은, 나붓나붓 꼿발든 버선 걸음으로 술상 이쪽으로 건너온다. 퇴계가 곁을 내주자 가만히 품에 안긴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포옹한 채 앉아있었다.


"두향아."


"예, 나으리."


"그냥, 네 이름을 불러보고 싶구나."


"예, 나으리."


"내가 여덟 살 때였던가. 둘째 형이 칼을 가지고 놀다가 손을 다쳤지. 그걸 보고 내가 크게 울었더니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손을 다친 건 네 형이고, 형은 울지 않는데 어찌 네가 그렇게 우느냐?'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두보의 향기가 나는구나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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