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일시적 유행인가, 대세적 흐름인가 ?" '추억의 축제'인 '복고 열풍'이 또다시 분다. 복고 열풍은 재작년 '건축학개론'이나 '세시봉', 지난해 '응답하라 1994'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사회현상의 한 트렌드로 이어지고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발화한 90년대 복고 열풍은 당시 20대로 X세대였던 젊은이들이 문화생산 중추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더욱 거세지는 양상이다.
일부에서는 90년대 소품과 배경, 놀이, 정치, 사회문화 환경과 X세대의 사랑, 우정, 갈등을 버무려 재탕한 '추억 팔기'로 치부한다. X세대는 소위 '강남 오렌지족'으로 불리는, '좀 놀아본 세대'다. 현재 이들은 사회무대 전면에서 다양한 문화소비를 낳고 있다.
90년대에는 인터넷과 휴대폰이 대중화되고, 서태지와 아이들, H·O·T, 핑클 등 음악그룹과 동시에 팬클럽문화가 나타나고 , 스타 매니지먼트를 구사하는 대형 연예기획사 출현, SBS 민영방송국 및 케이블 시대 개막 등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이뤘다.
대중문화평론가 강태규는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은 그 이전세대보다 문화적 추억이 풍부하다. 당시 문화 전반에 '웰메이드 상품'이 많았다. 현재 40대에게는 '90년대 콘텐츠'가 전혀 낯설지 않다. 이들이 문화생산자로 나서면서 90년대 황금기의 문화 아이템을 하나씩 새로 발굴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오래전부터 복고는 불황기 아이템 중 하나다. 상품 혹은 문화시장에서 불황 때마다 복고에 대한 소비는 늘상 나타나는 현상이다. 복고는 한두세대 이전의 문화 현상이 재현되는 형태로 히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의 중간 지점에서 '기억의 낡은 LP판'를 돌리 듯 재생됐다 사라지곤 한다. 넓게는 '엔틱'이나 '빈티지', 젠(Zen, 禪)스타일 등도 일종의 복고 성향이다. 그 형태는 리모델링, 업사이클, 히스토리텔링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복고 소재가 문화콘텐츠로 부상하자 문화비평계는 일시적인 사회현상으로 취급하기에는 석연치 않다는 분위기다. 복고풍 문화콘텐츠가 상품화, 소비로 이어지면서 산업계도 분주해졌다. 일종의 업사이클 제품들이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오락실 아이템인 'DDR', 휴대용 게임기 '다마고치', 다이얼과 스위치를 디자인한 '오디오'와 미니냉장고 형태인 '빈티지 냉장고', 필름 카메라 감성의 '미러리스 카메라', 7080을 겨냥한 음악주점 '밤과 음악 사이', 티켓몬스터의 '복고 여행' 프로그램, 음악다방, 명작만화 등 추억의 상품들이 다시 돌아왔다. 업사이클 제품들이다. 기존에 불황 아이템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전문가들은 "불황에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위로받으려는 사람들이 추억과 조우하면서 거부감 없이 지갑을 열고 있다"며 "복고 바람은 문화콘텐츠산업을 넘어 곧 여행, 의료, 패션, IT, 건설, 식료, 유통 등 전 산업 영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이는 과거와는 달리 올해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단순히 과거로의 퇴행적인 행태로만 보지 않는다.
최근 벼룩시장에 30, 40대가 넘실대는 게 한 예다. 지하철 1호선 동묘역 3번 출구 인근 중년들의 로데오거리인 '동묘 벼룩시장'에 젊은 층의 발길이 잦아져 평일에도 발 디딜 팀이 없을 정도다. 중년층이 노년층과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묘 벼룩시장에는 영국산 버버리코트, 롤렉스시계, 각종 공구, 중고 의류, 중고서적, 낡은 LP판이나 '플레이보이' 잡지 등 중고품, 골동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벼룩시장에서 만난 한 40대 직장인은 "한물간 물건에서 이야깃거리를 찾는 묘미가 있어 퇴근길에 종종 벼룩시장을 찾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옛 것을 멋진 물건으로 되살려내는 행위를 통해 아날로그적 향수와 히스토리의 가치를 누리려는 태도가 강해졌다. 불황기 소비 형태인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기)'와는 개념 차이가 확연하다. 인터넷과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거를 낚고, 세월을 사고 파는 행위가 단순한 소비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빛 바래고, 낡고, 고졸한 물건들은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에 찌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성과 여유를 제공해 준다. 사람들은 이런 물건속에 깃든 시간과 자취를 찾아내면서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물건에서 무형의 가치와 소통하려는 태도는 오늘날 디지털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과 상통한다. 여기에는 장인의 숨은 솜씨와 먼저 물건의 사용했을 사람에 대한 상상, 즉 히스토리가 더해진다. 히스토리에 대한 소비, 즉 복고풍은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는 문화 행위로 해석한다.
트렌드 분석 전문가인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과거의 물건을 구입하는 태도는 이전에 구입해서 썼던 사람의 인생과 세월을 향유하는 것"이라며 "가난하고 낡은 것을 갖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버려진 것에서 가치를 찾는 새로운 문화소비트렌드"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는 무조건 재활용이 아니라 일종의 업사이클 형태로 친환경, 사회적 책임, 매력적인 스토리 등 내재된 가치도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본적으로 인터넷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안긴다. 방대한 정보 홍수,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불필요한 정보, 개인 사생활에 대한 침해 등 온라인과 연결된 세상은 온통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온라인 네트워크가 확장될수록 기술의 진보가 가져다준 정보에 부담을 갖는다. 이런 까닭에 아날로그적 감성, 과거의 추억 등과 공존하려는 경향이 생겨 난다는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전문가들은 문화예술시장에서 '히스토리' 혹은 복고를 소비하려는 움직임, 즉 문화소비의 한 형태인 '히스토리텔링'은 장소성에 대한 향유, 역사유물 등 하드웨어적 재발견과 역사적 인물, 사건 등에 대한 스토리화, 복고풍의 문화콘텐츠 생산 등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한국관광문화원의 김혜인 박사는 '2014 문화예술 트렌드 분석 및 전망'에서 "히스토리에 대한 소비 행태는 올해 가장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이라며 "말하자면 장소 및 역사자원에 대한 히스토리텔링을 통해 문화 정체성, 문화 DNA를 동시에 향유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질 것"이라고 진단한다.
복고는 장소성에서도 리모델링, 업사이클 등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마포 석유비축기지'나 '당인리 화력발전소' 마냥 역사성을 가진 공간을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1930년대 지어진 서울 종로 서촌의 '보안여관' 등도 마찬가지다. 보안여관의 경우 외관 등 원형은 그대로 보존한 채 문화예술 전시공간으로 변모, 인기를 끌고 있다.
마포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현재 폐기 직전인 화력발전소 4, 5호기를 개조해 창작 및 향유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설계가 진행 중이며 오는 2018년 완료된다.이에 따라 당인리 발전소는 폐산업시설을 활용,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로 전환된다. 80여년이 넘은 발전소의 역사적 흔적과 기억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문화 허브, 문화 콘텐츠 인큐베이터 역할을 수행한다. 거대한 산업플랜트와 문화예술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결합해 흥미를 더해준다.
'문화역 서울 284'의 경우 낡은 시설물인 '서울 역사'를 개조해 시민들이 전시, 공연, 강연 등 문화 행사를 향유, 감상, 참여할 수 있게 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또한 역사성을 간직한 시설물을 문화공간으로 재활용했다는 측면에서 건물의 히스토리를 업사이클시킨 사례다.
공장지대를 예술창작공간으로 변모시킨 금천예술공장, 낡은 청사를 복합문화시설로 리모델링중인 '전남도청사' 등도 이에 해당된다. 장소성에 대한 복고 열풍은 오늘날 도시 리모델링 중요한 기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결국 장소성과 히스토리를 엮는 복고 행위속에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복고풍을 디지털에 대한 피로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를 추억하는 행위는 디지털 문화와 반대급부적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문화평론가인 정덕현은 "복고 콘텐츠는 반짝 유행이 아니며 90년대, 20대였던 청년들이 현재의 사회중추 역할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또 "이들은 디지털 시대를 거치며 IMF 구제금융 등 경제 위기를 체험했다. 이어 우울, 좌절, 디지털의 차가움을 겪으면서 좋았던 시절에서 위안을 찾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복고는 리셋되어 사라지는 것을 추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소비로 존재를 증명하는 시대에 새로운 정체성에 다가가려는 집단의식으로 설명된다. 폭넓게는 문화유산의 측면에서 문화 유산에 대한 향유, 보존, 수리, 복원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각 나라가 펼치는 역사문화자원 확보 경쟁은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물려 있다. 우리나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한 활동에 열을 올리는 것처럼 세계 각국 역시 비즈니스 차원에서 역사문화·유물, 무형문화 등을 브랜드화 시키는 작업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엔 문화재 보전과 전승의 중요성이 유형유산에서 기록 및 무형문화재 등으로 넓혀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6월 '난중일기', '새마을운동기록'을 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시켰고, 12월에는 '김장문화'를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즉 문화유산의 내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히스토리텔링'이 강조됨에 따라 새롭게 주목해야 할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폭넓게 발굴되고 있다. 실례로 지역문화 분야에서 파주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파주 이야기', 경북 영덕의 '인량리 팔풍정 이야기' 등은 매우 성공적인 히스토리텔링으로 꼽히면서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역사성에 현대적 관점을 입히는 복고는 점차 새로운 문화 원천으로 발전할 태세다. 지난해 건축가 고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 사옥' 보존, 문화재 등록 추진 움직임 등이 한 예다.
"'복고'라는 용어를 불황기에 낡은 물건을 다시 쓰는 것쯤으로 좁혀 해석해선 안 된다. 불황기 아이템이 아니다. 지금의 복고는 과거를 향유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재생, 리모델링, 업사이클 등 다양한 개념을 포함한다. 또한 복고가 문화적으로 히스토리텔링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를 포괄하는 문화 코드가 새롭게 설정돼야 할 때다. 당분간 90년에 청년기를 보낸 30, 40대가 문화 생산층을 이루고 있는 한 문화와 소비의 전성기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경향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김용섭 소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복고라는 용어 대신 새로운 문화코드를 부여하자는 의견도 주목할 부분이다. 자칫 폐기되고 잊혀지는 물건 혹은 문화속에도 사람과 시간이 콜라보레이션을 존재한다. 디지털 미래가 인간을 위한 완전한 진화일 수 없는 까닭에 옛 것과 공존하려는 노력은 간단히 치부할 사항이 아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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