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말 한 뮤지션의 죽음이 그를 아는 많은 팬들을 상심케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실험적 그룹을 통해 록 음악의 혁신을 가져온 루 리드. '기타를 든 철학자'로 불렸던 그의 죽음은 록 음악 역사 한 장의 종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그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점이 새로웠다. 만 71세의 나이지만 그는 원래 지난 4월 캘리포니아주에서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노익장이 희귀한 일은 아니다. 결성 40주년을 훌쩍 넘긴 롤링스톤즈는 지금도 라이브 공연을 심심찮게 하고 있다.
이들의 얘기를 접하면서 우리에게는 조용필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건재한 '오빠'로 남아 있는 그는 분명 한국 사회의 노익장의 한 상징과도 같다. 그러나 조용필이나 몇 안되는 고령의 음악인들은 우리 사회의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노인 현실의 비참함은 무엇보다 하루에 9명꼴인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계 최고의 자살률에서 드러난다. 이건 우리 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던 낙천적인 민족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참담한 기록이다. 높은 자살률에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된다는 것이 슬픈 진짜 이유는 '노인'의 부정으로 비로소 '노인'이 긍정되는 현실이다. 근육과 알통으로 청춘을 모방해야, 몸에 쌓이는 노화를 필사코 거역해야, 아이들처럼 우스꽝스런 광대가 돼야 그들은 겨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어서 했던 일을 나이 들어 알게 된다"는 말처럼 주름살과 쭈글쭈글한 피부, 물러진 뼈는 다른 많은 것, 잃은 것보다 더욱 귀한 것을 얻게 해 준다. 루 리드는 죽기 얼마 전 "청중들의 마음, 정신과 우주를 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더 많은 노래를 쓰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폭음과 마약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그가 이제 담담히 얘기하는 것처럼 노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비밀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 정온은 백발을 예찬하는 시에서 '본디 날 따르는 물건이거늘/굳이 뽑아버릴 필요 뭐가 있으랴'고 읊었다. 우리가 '청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리 평균수명이 늘더라도 '미성년 사회'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파고다 공원은 우리가 이 청춘공화국에서 결국엔 가야 하는 '유배지'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