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3미터가 넘는 대형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의 동물형상은 마치 식물의 뿌리를 연상시킨다. 동물의 몸을 빌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있는 식물들의 여행 같다. 열대지방에서 사는 낙타나 코끼리 같으면서도 동시에 녹아내리는 빙하를 닮은 북극곰의 형상들은 인류가 스스로 자초한 환경재앙을 경고하는 듯하다. 반면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둥근 알의 형상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또 다른 생명들을 연상시킨다.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정욱장 작가(53)의 열아홉번째 개인전에서 만난 작품들이다. 모두 광택 처리된 조각들은 초현실적이고 공상과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최근 모든 인류의 공통된 화두인 환경문제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끈다.
4일까지 '긴 여정(A Long Journey)'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정 작가의 개인전에는 3미터 이상의 조각품 3점을 비롯해 2미터에 육박하는 중형 조각 5점 등 47개 조각으로 구성된 12점이 선을 보였다. 이번 전시는 지난달 중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티센터의 '크리스탈스'에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친 정작가의 귀국 보고전 성격을 띠고 있다.
정욱장 작가는 "내 작품세계에서 여백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여백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빈 공간을 통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주관적 그 무엇을 의미한다"며 "여백은 단순화된 자연과 역사에 대한 본질의 초점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작품들이 지닌 주된 메시지는 '빈 여백'인 셈이다. 작품의 빛나는 금속의 표피는 세상 만물의 생명력이 시작되는 물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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