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닷가에/누가 써놓고 간 말/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씨펄 근처에 도장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린다/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의 '토막말' 중에서
■ 누군가 바닷가에 써놓고 간, 뜬금없는 외마디 소리 같은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이다. 저 토막말의 행간엔 얼마나 많은 말이 들어있을 것이냐. 가슴 벌렁이는 상심과 환장할 그리움과 돌이켜보는 후회와 다시 만나지 못하는 절망까지. 말 한 마디가 저 모래 위로 터져나가기까지 우여곡절 스무 살과 아리아리 서른 살과 어화둥둥 마흔 살 사랑의 장편소설이 풀세트로 꾹꾹 눌려져 있다. 나는 군대시절 고참에게서 귀에 익도록 들었던 전라도 말의 애절한 억양을 생각한다. 씨펄로 이어지는 그 코끝에 돌던 욕설의 은근한 소용돌이는, 진저리치는 마음의 회로를 어찌나 생생하게 담는지. 저렇게 그리운 건, 그 남도의 햇살과 소금끼가 없으면 불가능하리라. 모래펄에 상감된 허무한 한 시절이 참 푸르다 그말 속에서. 하늘이 눈 있으면 내려다보고 좀 읽어달라고 크게도 써놓은 그 말을, 무식한 밀물이 쓸며 지운다. 추억이 뭉개지는 소리에 저녁놀이 진저리친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정순아씨펄. 파도소리가 그렇게 들린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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