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잉글랜드)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유럽의 백년전쟁은 1453년까지 무려 116년이나 지속된다. 이 백년전쟁의 초반 영국을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해 준 계기가 크레시 전투였다. 1346년 프랑스 교외 크레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4만명 대 1만2000명이라는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보였으나 결과는 놀랍게도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영국군의 사상자는 불과 1000여명이었던 데 비해 프랑스는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2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프랑스에게는 왕이었던 필립6세까지 부상당한 치욕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했던 무기가 바로 장궁이었다. 롱보(longbow)라고도 불리는 장궁은 180cm의 활에 100cm의 화살을 사용하는 무기였다 장궁의 최대 강점은 속사와 유효사거리였다. 1분에 6발에서 10발을 발사할 수 있었고, 사정거리는 거의 500m에 육박하는, 현대전으로 말하면 장거리포에 비유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 프랑스 군의 주력궁수인 제네바 용병의 '크로스보우'(석궁)는 분당 겨우 2발을 장착할 수 있었고 사정거리도 100여m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먼저 제노바 용병을 내세워 석궁으로 영국군을 공격하였고 이어 기병대가 돌격전을 펼쳤으나, 모두 영국 장궁부대의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거의 궤멸되고 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엄청난 장궁의 위력을 맛본 이후에도 프랑스군은 장궁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군은 포로로 사로잡은 영국 장궁 궁수의 엄지손가락을 가차 없이 자르기는 했지만 장궁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백년전쟁 내내 하지 않았다.
이런 프랑스군의 행동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혁신이론의 관점에서는 '경로의존성'으로 설명된다. 경로의존성이란 우연히 선택된 경로가 다른 경로의 선택을 방해한다는 이론이다. 즉 프랑스군의 석궁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축적이 장궁의 도입을 방해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와 아이폰의 경쟁에서도 백년전쟁 당시의 프랑스군과 유사함이 보인다. 이번에 발매된 아이폰5s도 역시나 새로운 혁신은 보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조금 더 우아해진 디자인에 외면 컬러 정도로 승부한, 스티브 잡스가 무덤에서 통곡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전세계의 속칭 '애플빠'들은 아이폰5s를 사려고 밤을 새워 매장 앞에서 기다렸다.
이에 반해 삼성 갤럭시는 많은 사용자들이 애용하지만 그렇다고 열광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두 제품이 가지고 있는 제품 속성 때문이다. 아이폰은 '어른들의 장난감'인 데 반해 갤럭시는 'IT 디바이스'이다. 아이폰은 '사용하는 즐거움'을 주는 데 비해 갤럭시는 '사용하는 편리함'을 준다. 아이폰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융합'되어 있는 데 반해 갤럭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따로 논다'. 간단한 예로 메일이나 파일을 지울 때 아이폰은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빨려 들어가는 데 비해 갤럭시는 삭막한 창이 하나 떠서 '지우겠냐'고 묻는다. 메일이 날아갈 때도 아이폰은 비행기 소음이 나는 데 반해 갤럭시는 기계음뿐이다.
이런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간단한 것 같지만 실은 단순하지 않다. 아이폰 화면의 터치반응, 아이튠즈와의 연동 등도 사용자의 감성을 염두에 둔 치밀한 설계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삼성 갤럭시는 편리하기는 하지만 사용자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삼성은 써 본 사람이 싫어하고 애플은 안 써 본 사람이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현재 삼성이 아이폰을 능가하는 것은 아이폰이 스티브 잡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혁신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스티브의 망령은 삼성의 자유로운 시도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애플이 다시 깨어나기 전에 삼성은 아이폰이라는 장궁을 분석하고 흡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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