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정병선의 世·市·人]기갈(飢渴)

시계아이콘02분 02초 소요

[정병선의 世·市·人]기갈(飢渴)
AD

"천천히, 꼭꼭 씹어, 많이 자시게!"


구십을 바라보고 계시는 노모(老母)가 육십을 코앞에 둔 초로(初老)의 아들에게 끼니때마다 하시는 말씀이다. 밥을 먹는 일이 삶의 전부이자 국가적 과제이기도 했던 적빈(赤貧)의 시대를 견뎌내면서 '천천히, 꼭꼭, 많이'는 어머니의 식사법을 수식하는 항용부사(恒用副詞)가 돼버렸다. 그 시절 어머니는 자식들 하루 세끼 챙겨 먹이기에 필사적이었으며 교육에는 결사적이었다.

육십년 가까운 세월을 무슨 주문처럼 이 말씀을 듣고 살았지만 '천천히, 꼭꼭 ,많이'를 동시에 실천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천천히'와 '꼭꼭'은 상호보완적이나, 그것을 전제로 하는 '많이'는 상호배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저 먹기에 바빴던 어린 시절에는 청개구리처럼 '빨리, 대충 씹어, 많이 먹기'에 몰두했다. '꼭꼭'은 나이 들어 위장의 기능이 다소 약해진 요즈음 억지로 해 보기는 하는데, 야전군 생활 3년을 거치는 동안 속식(速食)이 버릇을 넘어 고질(痼疾)이 되어 버린 탓에 아직도 '빨리'의 버릇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뜬금없이 도지는 식탐(食貪)을 버리지 못해 '많이'만 가끔 할 뿐이다.


어머니의 이 거룩한 주문을 어린 시절에는 한낱 잔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철이 들어서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천국이다' 라고 노래한 시인처럼 그저 '모성(母性)에서 우러난 의무와 사랑'이었거니 했다. "말이 가깝고 가리킴이 먼 것이 선언(善言)이며, 그 지킴이 간략하면서 베풂이 넓은 것은 선도(善道)"라 하였는데, 밥 먹는 일상의 일을 들어 철리(哲理)를 터득게 하신 어머니의 선언과 선도를 깨달은 것은 머리가 희끗해 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키지 못한 시간들을 회한으로 반추할 때의 일이다.

맹자가 말 하였다. "굶주린 자 달게 먹고, 목마른 자 달게 마신다. 이는 아직 음식의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이다. 주림과 목마름이 그를 해하기 때문이다. 어찌 오직 입과 배만이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가 되겠는가. 사람 마음이 또한 다 해로움이 된다. 사람이 능히 기갈의 해로움으로써 마음의 해로움으로 삼지 않는다면, 남에게 미치지 못함을 근심으로 삼지 않는다." '천천히, 꼭꼭, 많이…' 어머니는 음식의 바름을 자식에게 몸으로 알려주어 기갈의 해로움이 마음의 해로움이 되지 않게 그토록 노심초사하셨던 것이다.


무상급식시대, 밥이 해결된 요즈음, 기갈의 해(害)는 삶의 다른 영역으로 번진다. 지난 학기 '신 금융상품론' 강의 마지막 시간, 맹자의 대장부론을 낭독하게 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금융윤리교육의 한 방편이다. "세상의 넓은 곳에 거처하며, 바른 자리에 서며, 세상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케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 낭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항의에 가까운 원성이 터져 나왔다. 여자니까 대장부가 되지 않아도 괜찮지 않느냐는 애교담은 거부, 방탕의 유혹에 빠질지라도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조(自嘲) 섞인 비아냥, 대장부 안 되어도 취직만 했으면 좋겠다는 푸념과 한숨.


'내가 대학시절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와 민주를 갈구하였나니…' 하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무색해져 차마 뱉지 못했다. 취업난으로 기갈이 이미 청춘의 마음속 깊숙이 스며들었음이니, 멀고 아득하구나, 옛 성현의 말씀이여!


머쓱해져 강의실을 나오는데 다산(茶山)선생의 탄식이 폐부를 찌른다.


"지금 천하의 총명하고 지혜로운 인재를 모아 한결같이 모두 과거(科擧)라는 절구통에 집어넣고는 마구 빻고 때려서 이들이 부스러지거나 문드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할 지경인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슬펐다.


정병선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집필자 프로필


정병선(鄭秉善)
(현직)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투자론, 파생상품론 강의), 한국 파생상품학회 이사


2013년 3월, Finance의 새로운 분야인 행태재무학(Behavioral Finance)과 동양철학을 융합, 통섭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유학과(儒學科)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면학(勉學)과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아우르고 있음


(주요경력)
템피스 투자자문(주) 부사장
한국 금융투자협회 파생상품 서비스 본부 전문위원
한국선물협회 연구위원머니투데이 국장급 전문기자
모닝스타 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신흥증권(현 HMC 증권) 상무 겸 리서치 센터장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
(학력)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경영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경영학석사)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경영학 박사)


(저 서)
1) 지피지기 주식투자, 1999년 7월 31일 명상출판사
2) 노자와 생맥주, 2004년 6월 10일 정진출판사 - 노자 도덕경으로 배우는 81가지 투자지혜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