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기록물을 국가정보원장이 '자발적으로' 폭로하여 '한국의 위키리크스는 국가정보원'이라는 외신의 조롱거리 대상이 되더니, 급기야 여야 국회의원이 함께 기밀문서를 열람하기로 했단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며칠에 걸쳐 열람단을 구성해서 국가기록원에 가더니 기록물 원본이 없단다. 막장 드라마, 욕하면서 본다는 말이 싫어서 최근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기록물 막장 코미디'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졌다. 기록물 원본이 없다는 뉴스에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정말 눈물이 날 만큼 웃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기록의 위대함'을 실감했던 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성계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세계 역사상 어떤 기록물과도 견줄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역사를 기록한 사례가 없기도 하거니와 내용 면에서 독립성과 신뢰성이 높아 사료로서의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엄정한 기록을 위해 사관들이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태종이 편전에 있을 때 사관 민인생이 들어와 기록을 하려 하자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민인생이 편전이든 어디든 대신이 일을 아뢰고 경연의 강론을 펼친다면 기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편전은 쉬는 곳'이라면서 다시 한 번 만류하자 민인생이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이 아버지 태종의 사초를 보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열람하지 못한 일화도 있다. 연산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사초를 열람하여 사화를 일으켰으며, 결국 왕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기록의 내용뿐만 아니라 기록을 보관하고 후대에 남기는 노력도 철저했다. 임진왜란 당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 등이 모두 불탄 와중에 전주사고본이 보존된 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관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전쟁이나 병화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등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다. 3년마다 책을 거풍시켜서 습기를 제거하고 부식 및 충해를 방지하는 '포쇄'를 시행하는 등 실록 관리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포쇄를 끝내면 다시 궤속에 넣고 봉인을 여러 겹 하여 실록의 내용이 누설되거나 공개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기록의 내용은 사관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엄정하게 하려 노력하였고, 기록의 보관은 심산유곡의 격리된 사고에 비장하여 전쟁 및 각종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를 썼다. 물론 왕도, 대신도 이를 사사로이 열람할 수 없었다. 국정 운영의 참고자료로 삼기 위해 별도의 요약자료를 만들었으며, 실록을 고증할 필요가 있을 때는 사관을 사고에 파견해 관련 내용만을 베껴 오도록 하였다.
역사란 엄정한 기록이 생명이다.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을 막론하고 엄정하게 기록한 것이 쌓여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은 하늘과 역사를 두려워했고, 따라서 사관 앞에서 긴장하고 후대의 평가를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통치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기록에 관한 한 야만의 시대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증발이란 '막장 코미디'를 보면서 '조선왕조실록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이제 더 이상 막장 코미디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제 검찰로 넘어간다고 하니 원칙과 법을 어기고, 역사 앞에 죄인이 된 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원칙과 법'에 의해 처벌받기를 기대한다.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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