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솔직히...지난해 괜히 잘했나 싶어요."
프로선수가 꺼낼 수 있는 가장 서글픈 이야기였다. 황진성에게 2012년은 생애 가장 빛나는 해였다. 41경기 12골 8도움으로 포항 스틸러스를 FA컵 우승과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 획득으로 이끌었다. 데뷔 10년 만에 시즌 베스트11에 뽑혔고,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도 달았다. FA 자격 획득과 동시에 따라붙은 '최대어'란 수식어는 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누구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연봉 협상에서 대폭 인상을 기대했지만 구단은 생각지도 못한 초라한 금액을 제시했다. 돈은 다음 문제였다. 믿었던 구단의 냉대는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시즌 개막이 다가오지만 협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황진성에게 포항이란 이름은 가족이자 연인의 동의어였다. 희생과 양보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돌아온 건 차갑게 돌아선 뒷모습. 다시 검붉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지조차 두려워한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
살이 좀 빠졌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적잖게 해서 그런가보다.(웃음)
단도직입으로 묻겠다. 연봉 협상은 정확히 어떤 상황인가.
지난해 성적이 좋아 구단이 어느 정도 대우를 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협상을 시작하자마자 구단은 병역 문제를 거론했다. '올해만 하고 군대에 갈 것 아니냐', '당장 병역법 때문에 전지훈련이나 ACL 원정도 못가지 않느냐'라고. 모기업의 어려운 사정까지 거론하며 인상폭을 굉장히 적게 얘기했다. 실망스러웠다. 2차 협상 땐 나도 요구액을 처음보다 많이 낮췄다. 그럼에도 온도차는 여전히 컸다.
서운함이 적지 않은 듯하다.
군대 문제가 걸려있고, 해외에 못나가는 상황인건 맞다. 그래도 구단이 날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런 문제를 감싸주고 조심스럽게 대해줄 거라 믿었다. 오히려 그 점을 부각시켜 협상 무기로 사용하고, 1년 밖에 못쓸 선수 취급할 줄은 몰랐다. 섭섭하다. 지난 10년 동안 기대에 못 미쳤기에, 늘 양보하고 최대한 빨리 재계약을 맺었다. 그저 언젠가 좋은 활약을 보이면 그에 걸맞게 보상해주고, 자존심을 세워 주리라 믿었다.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돈 문제가 아니란 얘기로 들린다.
맞다. 몇 천만 원 더 받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 그저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생각하는 만큼, 그동안 구단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했던 점을 인정해주길 바랐다. "형편이 어려워 미안하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치를 줄께"란 식으로 접근했다면 기꺼이 사인했을 거다. 하지만 구단은 처음부터 내 생각을 들을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난 포항이란 팀을 평생 함께할 동반자로 여겼다. 이젠 '언제든지 약점을 트집삼아 등 돌릴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정말 내년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는 건가.
단 한 번도 올 시즌 뒤 입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년 이후로 연기할 수도 있다. 병무청에 문의해보니 AFC와 연맹의 공문이 있으면 ACL 참가가 가능할 수 있다고도 하더라. 상무 선수도 월드컵에 나가지 않았나. 그럼에도 마치 당장 내년에 입대할 것처럼 어디선가 스멀스멀 얘기가 나왔다. 병역 문제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 일일이 대응을 못했는데, 가만히 있자니 한계가 느껴졌다.
내년 공익근무와 동시에 챌린저스리그 화성FC에서 뛸 것이란 이야기까지 나왔다.
(황)지수형이 "전지훈련 기간 동안 운동할 곳 필요하면 연락해봐"라며 화성 코치님 한 분 연락처를 주고 갔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사가 나와 황당했다. 나와 '교감'을 나눴다고 하는데 구단이나 감독님과 그 어떤 연락도 주고받은 적이 없다. 이건 아니지 싶었다.
재계약 협상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나는 포항 유스 출신 1세대다.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훗날 후배들에게 피해가 간다.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끝까지 싸워볼 생각이다. 다만 구단과 다투는 선수란 이미지로 비치다보니 감독님과 팬들에게 미안하다. 황선홍 감독님은 마냥 다독여주시고, 팬들도 트위터에 격려 메시지를 많이 보내주신다. 그래서 더 죄송하고 속상하다. 난 누구보다 포항이란 팀에 충성도가 높은 선수였는데….
포항에서 뛰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나.
지난 10년 간 명문 팀에서 뛴다는 자부심과 행복이 대단했다. 어떤 의미에서 포항은 내게 연인 같은 존재였다. 토티(AS로마)나 델 피에로(유벤투스)같은 한 팀의 레전드로 남길 꿈꿨다. FA자격을 얻고 다른 구단의 제의도 많았지만 전부 미루고 포항과 계약만 생각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그런 마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냥 당장 입대하고, 병역 의무를 마치면 해외로 나가서 뛸까란 생각까지 하고 있다. 과거 내 플레이 영상을 보면 눈물이 난다. 가족 같은 이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축구했던 시간들인데, 이젠 그런 시간이 다시 올 수 없을 것만 같아...슬프다.
전성호 기자 spree8@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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