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 봉천동 장군 생가 1973년 공원 조성
안국사 장군 영정, 도난 당해 새로 만들기도
[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 소복이 쌓인 눈 사이로 범상치 않은 기운의 동상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동상 주위를 둘러 잘 다듬어진 사철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그 높이가 족히 10여m는 돼 보인다. 지난 1997년부터 자리를 지켰으니 그 세월이 벌써 15년을 넘었다.
동상의 주인공은 갑옷에 투구를 눌러 썼고, 매서운 눈매를 한 채 말에 올라 타 있다. 왼손으로는 말을 다루고 오른손에는 검을 들었다. 흡사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장수(將帥)의 모습이다.
서기 948년(고려 정종 3년) 금주(衿州) 출생, 작은 체구를 지녔지만 송나라 사신이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문곡성(文曲星, 북두칠성 중 네 번째 별)’에 비유했을 정도로 기개가 웅대했던 그가 동상의 주인공이자 ‘귀주대첩’으로 잘 알려진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다.
금주는 조선시대 ‘금천(衿川)’으로 불린 곳으로 지금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일대를 이른다. 낙성대는 장군이 태어나던 날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이름을 얻었다.
<고려사> 열전에는 장군의 탄생일화에 대해 ‘어떤 사신이 한밤 중 시흥군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찾아보게 하니 별이 떨어진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적고 있다. 장군의 집안은 부친 강궁진(姜弓珍)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3만1350m² 규모, 서울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 바로 이곳이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자리했던 낙성대다.
정부는 10만의 거란대군 침입에 종지부를 찍은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3년부터 약 4억58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일대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74년 6월부터는 사당과 사적비 등이 들어서 낙성대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낙성대를 두고 서울대학교 뒤편에 위치한 조그만 대학이라는 얘기가 우스개처럼 떠돌지만 인근 주민들에게는 소중한 역사공간이며 휴식공간이다.
한적한 오후 찾은 낙성대는 눈이 녹지 않은 채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입구에 위치한 장군상을 지나 50m 지점의 홍살문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린다. 다시 50m 정도를 오르면 ‘안국문(安國門)’이라 쓰인 현판이 보인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의 출입문으로, 안국사로 통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 문을 통과해 반듯이 난 돌길 양 쪽으로 낙성대 3층석탑과 장군 사적비가 나타난다. 석탑은 13세기경 고려 백성들이 72세 나이로 귀주대첩을 이뤄낸 장군의 지혜와 용맹을 기리고자 지금의 봉천동 218-9번지에 세운 탑이다.
공원을 조성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다. 자재는 화강암이고, 높이는 약 4.5m다. 석탑 앞쪽에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라는 글귀에서 이곳이 장군의 출생지란 사실을 확인한다.
20여m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는 장군 사적비에는 ‘고려 강감찬 장군 사적비’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거북이 등 위에 세워진 비의 측면에선 ‘1974년 6월 10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세움, 일중 김충현 쓰고, 노산 이은상 짓고’라는 작은 글씨도 보인다.
탑과 비석을 지나 모습을 드러내는 게 바로 ‘안국사(安國祠)’다. 앞뜰까지 포함해 237.6m² 규모로, 안국사 사당 안쪽으로 귀주대첩도를 비롯해 당시를 표현한 6점의 그림이 긴박했던 분위기를 전한다. 그리고 정면에 장군의 영정이 있다. 조성 당시 있었던 영정은 1990년대 도난 당해 지금은 새롭게 제작된 영정이 자리를 지킨다.
한 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사당 앞으로 두터운 주황색 점퍼 차림의 중년여성 한 명이 장군 영정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 무언가 간절한 바람을 전했을 그 여성의 기도와 늠름한 영정 속 장군의 모습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는 혹자의 말이 스친다.
사당에 이르는 정중앙 돌길과 몇몇 계단을 제외하면 앞뜰은 눈으로 가득하다. 계사년(癸巳年) 새해 내린 눈이 추운 날씨에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 간헐적으로 찍힌 발자국에서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사당의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방해하는 어지러운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까치와 비둘기 무리가 새하얀 눈 속으로 연신 부리를 집어넣는다. 처마 위 지붕에 수줍게 내려앉은 눈과 앙상한 가지를 뻗은 나무, 그 와중에 푸름을 뽐내는 사철나무가 동공에 비치는 이곳의 겨울풍경이다.
낙성대 이외에도 서울 도심에는 역사 속 위인들과 관련한 유적들이 많다. 지명과 도로명에서부터 그 같은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세종로와 퇴계로, 율곡로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일제식 명칭을 개정하면서 우리 명현과 명장의 이름을 붙여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됐다.
강감찬 장군과 함께 구국의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을지문덕 장군의 성(姓)에서 유래한 ‘을지로’와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 지은 ‘충무로’도 익히 알려진 곳이다.
특히 충무공은 1545년(인종 원년) 한성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남산 북쪽기슭)에서 태어나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오늘날의 충무로 일대에서 보냈다. 현재도 충무로 일대 거리바닥에는 거북선 그림이 새겨져 있고 동시에 생가터 임을 알리는 표지석도 볼 수 있다.
서울 주변 가까운 곳에 또 다른 형태로 살아 숨쉬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 서울은 그런 인물들의 숨결로 과거와 현재가 대화를 나누는 곳이 되며 그 만큼 더 풍요로운 공간이 된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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