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미친 것 같아요. 걘 왜 그러지 진짜?"
지난 2월 인천 유나이티드 괌 전지훈련 당시 동갑내기 친구 이영표를 향해 김남일이 던진 익살 섞인 일갈이다. 김남일은 베테랑이 되면서 오히려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이영표는 축구계 전체에도 쓴소리를 곧잘 하지 않나"라고 묻자 그는 바로 특유 장난스런 말투로 되받아쳤다. 어느 순간부터 이영표는 축구계에서 '고언 스페셜리스트'로 통한다. 모두가 몸을 사릴만한 민감한 문제에도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그런 그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초 자리는 현역 은퇴를 위한 자리가 될 가능성이 커보였다. 그러나 행정가 꿈을 향한 행보가 될 것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영표는 1년 현역 연장을 선언했다. 자연스레 기자회견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어느덧 주제는 'K리그의 현실'이란 다소 무거운 영역으로 넘어갔다. 이영표는 이번에도 가슴 속에 담아뒀던 생각을 마음껏 드러냈다. 주변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던 얘기였다. 통상 기자회견은 20분이면 끝나는 게 보통. 하지만 이날은 50분 가까이 소요됐다.
근거 없는 비난은 없었다. 이영표는 선수 생활 동안 한국·네덜란드·영국·독일·사우디아라비아·미국 등 각 대륙 6개 리그를 두루 경험했다. 그는 선수로서 드물게 축구 행정과 마케팅에 관심이 깊다. K리그 흥행에 대한 거시적 관점부터 미시적 방법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속엔 자신이 은퇴 뒤 왜 축구 본고장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행정가로서의 미래를 찾는지에 대한 이유도 담겨있었다.
회견이 끝난 뒤 취재진 사이에선 "기자회견이 아니라 '이영표 특강'이었다"란 농담 섞인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렇기에 가감 없이 전문을 통해 그의 주장을 전하고자 한다. 그래야 이영표의 '진심'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다음은 이영표와의 일문일답
이렇게 별도로 기자회견을 열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예상대로 은퇴 선언인가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내 은퇴를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안 기다리셔도 된다. (웃음) 사실 작년 이맘때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3개월 전부터 은퇴를 고민해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1년 더 선수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년 후에는 여러분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반드시! 은퇴하겠다.(웃음)
여기있는 누구도 이영표의 은퇴를 기대하지 않는다. (웃음) 현역 생활을 1년 더 연장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부터 늘 은퇴 이후 축구 행정가로서의 비전을 갖고 있음을 밝혀왔다. 축구를 계속 하는 건 행복하고 기분 좋은 일이지만, 선수생활을 더 하는 만큼 새로운 일을 배울 시간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고민이 참 많았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1년 더 뛰기로 결정한 건 이유는, 일단 나이가 드는데도 이상하게 체력이 안 떨어지기 때문이다.(웃음) 또 소속팀으로부터 굉장히 좋은 제안을 받았다.
어떤 제안인가
밴쿠버 회장이 직접 전화를 줬다. 1년만 더 팀을 위해 뛰어준다면, 은퇴 이후 행정·재정·운영·마케팅 등 전 분야에 걸쳐 구단 내에서 직접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중요 프로젝트에도 동참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은퇴를 하려는 건 빨리 그런 점들을 배우기 위함인데, 1년 더 선수생활을 해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셈이었다. 사실 회장은 내게 당장 은퇴하더라도 동일한 기회를 주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를 향한 진심이 느껴졌고, 그런 점에서 마음이 움직여 은퇴 결심을 미루게 됐다.
내년에는 만 36세가 되는데 체력적 문제는 없을까
2012시즌에도 한 경기만 빼고 전부 풀타임을 소화했다. 다만 밴쿠버 정반대 편의 동부지구로 원정을 갈 때면 부담이 된다. 비행기로만 7시간이 걸리는데다 어떨 땐 경유까지 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시차도 서너 시간 정도 나고. 하지만 구단에서 다음 시즌엔 동부 원정 경기에서 내게 휴식을 주겠다고 약속했기에 체력적 문제는 크게 없을 것 같다.
사실 국내 팬들은 이영표가 은퇴 직전 K리그에서 뛰는 모습도 기대했었다
작년 겨울에 FC서울에서 잠시 훈련을 했었다. 한국말로 훈련하는 것도 편하고, K리그에서 뛰고 싶단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밴쿠버와 비슷한 제안을 한 국내 구단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힘들더라도 알고 싶은 것을 배우는 일이었다. 특히 미국 무대에선 유럽에서 축구할 때 얻지 못했던 것들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축구의 본고장이 아닌 미국에서 행정가 수업을 받으려는 이유도 궁금하다
물론 유럽 축구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데다 열광적인 팬 문화도 있다. 주변에서도 내가 행정가의 길을 걷겠다고 하니, 대부분 유럽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유럽은 축구 자체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관중을 더 모으겠다는 생각 대신 어떻게 하면 좋은 성적을 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미국은 다르다. 축구는 다른 4대 스포츠에 밀려있고, 처음 MLS(미국메이저리그사커)가 출범할 때만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지난 10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K리그 최고 인기 구단인 FC서울의 올해 평균 관중이 2만 명이라고 들었는데, 작년에 창단한 밴쿠버도 평균 관중이 2만 명이다. 그것도 아이스하키가 대세인 캐나다에서. (웃음) 확실히 미국은 유럽보다 관중을 어떻게 불러 모으고, 어떻게 축구를 팬들에게 소개하고 접촉점을 찾는 법을 안다. 이런 것들은 유럽에서 배울 수가 없다. 마케팅 비용면에서도 잉글랜드는 미국의 1/10 수준이란 얘기를 들었다. K리그 같이 흥행이 필요한 리그는 유럽보다 미국의 프로그램을 좀 더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영표 본인이 생각하는 K리그의 문제점은 어떤 것인가
개인적 생각임을 전제하고 얘기하겠다. 예를 들어 내게 한국시리즈 7차전 VIP 티켓이나, 슈퍼볼 티켓이 주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경기 시간에 내게 다른 할 일이 생겼다면, 난 경기장에 가지 않을 것이다. 난 그 경기장에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LA 레이커스 경기는 보러 가지 않지만, 내 친구나 아들이 동네에서 농구시합을 한다면 보러 간다. 이유 없이 관중은 경기장에 오지 않는다. 관중에겐 여자친구를 안 만나고, 다른 할 일을 제쳐놓고 경기장에 갈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결국 마케팅이란 이유 없는 사람들에게 본인도 몰랐던 이유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K리그엔 그런 점이 부족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부족한가
며칠 전 올 시즌 K리그가 끝나고 감독이 10명이 바뀌었다는 기사를 봤다. 물론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분들이 많지만, 이것만 봐도 ‘웃분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알 수 있다. K리그에 관중이 많아지고, 더 많은 스폰서와 중계권료가 붙으며 시장이 커지려면 축구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반면 K리그의 목적은 오직 성적에만 있다. 이런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아마 내년에도 10명의 감독이 바뀔 것이다. 기업구단 사장 혹은 시민구단 시장은 본인이 팀에 있는 2~3년 동안 성적을 내고, 그래야 본인의 인사고과가 오르고 할 얘기도 있다. 그러니 오직 성적에만 목을 매는 것이다. 이래선 발전이 없다. 일본도, 미국도, 중동도 해냈는데 왜 한국만 프로축구가 인기가 없을까. 한국 사람들이 그들보다 축구를 더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는 건 아닐 텐데. 결국 K리그의 성적 지상주의가 문제다.
MLS는 어떻게 팬들에게 경기장에 올 이유를 만들어주는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시작점부터 다르다. MLS에서는 리그 경기 도중 어느 한 팀이 0-2로 지고 있는데 하프타임 때 감독이나 선수에게 리포터 인터뷰가 들어온다. 후반전에 어떤 전술로 임할 것이냐고.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경기가 끝난 뒤엔 기자들이 전부 라커룸에 들어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TV를 보는 시청자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모든 초점이 철저하게 팬 위주로 맞춰져 있다.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그들을 좀 더 즐겁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승패를 넘어 더 많은 팬들이 더 많은 돈을 쓰게 해야 시장이 커진다. 팬들의 주머니에서 중계권료가 나오고, 그 중계권은 연맹에 이익을 준다. 그렇기에 연맹도 팬들을 위해 모든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유럽은 '스포츠는 스포츠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맞다. 하지만 둘은 다를 뿐이지 어느 한쪽이 틀린 게 아니다. 한국 축구가 이들 사이에서 적절한 방향과 타협점을 찾는다면 충분히 많은 관중을 경기장으로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유럽 역시 성적이 안 좋으면 감독이 경질되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조금 다르다. 유럽에서 감독이 경질되는 것은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유럽은 순위에 따라 그 해의 수입이 달라진다. 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 출전권을 획득하는 것도 그렇고, 중계권도 다르다. 성적이 곧 수익이다. 따라서 감독 경질의 내면에는 성적이 아닌 수익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다. 반면 K리그는 경질하는 이유가 성적 그 자체뿐이다. 경질과 수익에 전혀 연관이 없다. 포커스가 잘못 맞춰져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K리그 각 구단이 인건비가 너무 커서 힘들다고 하더라. 팬들을 모으는데 돈을 쓰면 되는 문제다. 더 많은 관중이 모이고, 그들이 더 많은 돈을 쓰면 구단도 커지고, 선수들 연봉에도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다. 그런데 K리그는 거꾸로 선수들 연봉부터 챙긴다. 중소구단 1년 예산 80억에서 50억가량이 선수급여로 들어간다. 남은 30억으로 구단 직원 급여 주고 뭐 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결국 재생산 안 되는 비용만 들어가고, 구단 재정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니다. 50억을 팬을 위해 쓰고 30억으로 선수 운영하는 게 맞다. 이런 지출 방식을 결정하는 게 결국 구단 사장이나 시장인데, 아까 말했듯이 이들은 시장 전체가 커지는 것보다 자신의 명성을 얻는데 집착한다. 그러니 한국 축구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무분별한 감독 경질에 대한 문제도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팀이 어떤 문제를 겪을 때 마지막 해결책으로 감독을 경질하는데, 자세히 보면 교체되어 들어온 지도자가 또 경질되어 나간다. 그건 유럽도 마찬가지다.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그 중엔 정말 안 좋은 지도자도 있지만, 그런 이는 극히 일부분이다. K리그 감독이 될 정도 능력이라면 충분히 인정받은 지도자다. 그런데도 감독 경질이 최상의 해결책이라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가장 바뀌어야 될 사람들은 정작 감독을 바꾸는 걸 결정하는 그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기자회견의 흐름이 너무 무거운 얘기로 흐른 듯싶다. 주제를 조금 바꿔 앞으로 본인의 계획을 얘기해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어떤 계획을 세워 그대로 된 적이 없었다. (웃음) 계획을 세운다는 건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지금은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당장 미국 프로축구가 관중을 많이 늘린 구체적 방법을 알고 싶다. 나이와 문화, 성별에 따라 다 경기장에 오는 이유가 다를 텐데, 그걸 각자 어떻게 찾게 해준 것인지 궁금하다. 그걸 먼저 배우는 것이 내 당장의 목표다. 그런 이후에나 다음 일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 내 발언으로 나와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 같다. (폭소)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이영표와 박지성이 돌아왔으면 하는 팬들도 여전히 있는데
현재 대표팀이 최종예선에서 힘든 과정에 있긴 하지만, 최강희 감독님이 잘하고 계신다. 문제점을 잘 해결해나가고 계셔 무리 없이 본선에 오를 것이라 믿는다. 또 다른 많은 분들도 잘 준비하고 있어 대표팀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나도 이제 대표팀에서 은퇴한 한 명의 한국 축구 팬이기에, 박지성이 돌아온다면 대환영일 것 같다. (웃음)
K리그 외에 축구협회에도 고언할 내용은 없나
축구협회에 대해 말하는 건 힘들다. 다 선배들이셔서. (웃음) 만약, 만약에 협회에 할 말이 생긴다면 내가 직접 하겠다. 그것도 단도직입적으로. (웃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이제 곧 은퇴할 별 볼일 없는 선수에 불과하지만 꼭 부탁드리고 싶다. 긴 시간 동안 축구를 통해 즐겁고 행복했는데, 여기 있는 분들이 바뀌지 않으면 축구는 바뀔 수 없다. 내가 30년간 축구 선수로 뛰었던 모든 리그가 발전했는데 유독 아시아 최강인 K리그만 발전하지 못했다. 합당하지 못한 일도 많았다. 이런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분들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과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일을 구분해서 가감 없이 지적해주었으면 한다.
전성호 기자 spree8@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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