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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33>기업가들의 첫 수난사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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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商道, 그 빛과 그림자의 뜨락
일제강점기때 기업한 죄, 박흥식 반민특위 1호 체포

[한국기업성장史]<33>기업가들의 첫 수난사 '1949년' 일제시대 종로거리에 위치한 화신백화점(사진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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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남북은 분단됐다.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케 되면서 자연스레 허리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남북 교역은 한동안 별 문제가 없었다. 북한에서 남한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대가로 남한에선 일용품 등 잉여 물자를 공급해주는 형태로 서로 오갈 수 있었다.


미군정청에서 쌀과 귀금속 등 몇 가지 통제 품목을 제외하곤 북한과의 교역은 자유라고 정식 발표하면서 민간 차원의 교류도 활발했다. 북한에선 주로 비료와 수산물이, 남한에선 면화와 생고무 등으로 물물교환이 이뤄졌다.

그러던 1948년 5월10일 유엔 감시 아래 남한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자 북한은 나흘 뒤 그동안 남한에 공급하던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남북 교역 또한 중단되고 말았다.


이윽고 1948년 8월15일 제1공화국으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송전 재개 교섭을 하면서 중단된 교역도 다시 추진하기 위해 남북 교역에 관한 세칙을 발표했다. 이 조치에 따라 같은해 12월 박흥식의 화신무역은 우리 나라 최초의 무역선 2200t급 앵도환을 띄웠다. 뱃고동 소리도 요란하게 북한의 원산항으로 출항시켰다.


앵도환은 북한의 대외 무역 창구인 조선상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면사, 생고무, 휘발유 등을 싣고 원산으로 향했다. 돌아올 땐 흥남비료공장에서 비료를 싣고 오기로 예정돼 있었다. 선박의 안전 운항은 조선상사가 보증했다.


앵도환이 북한의 원산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듬해 정초,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회장이 그만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됐다. 북한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된 박흥식이 친일파인 점을 문제 삼고 나섰다. 친일파인 반동분자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앵도환을 원산항에 억류하고 화물을 몰수한 뒤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른바 1949년 1월에 발생한 '앵도환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교역은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남북 교역이 재개되기까지는 무려 30여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보다 앞서 국회에선 '8ㆍ15 해방 이전의 악질적인 민족 반역자'를 처단할 특별법인 '반민특위법'이 제정된 데 이어,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조사위원회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악질적인 민족 반역자는 일제하에서 작위를 받은 자, 고급관리를 지낸 자, 밀정, 악질행위자, 중추원 부의장 이상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기타 종교 문화 사회 부문에서 일제에 협력한 자 등을 의미한다.


[한국기업성장史]<33>기업가들의 첫 수난사 '1949년' 박흥식

한데 그 첫 번째 대상자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었다. 그의 죄목은 종전을 1년 남짓 남겨둔 1944년, 당시 경성상계의 유력한 기업가들을 규합해 경기도 안양에 자본금 5000만원(지금 돈 약 6조원) 규모의 조선비행기공업㈜를 설립,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수행을 지원한 것이었다.


뒤이어 소위 애국기라는 이름을 붙여 일본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 한 대씩을 바쳤다는 자동차왕 방의석이, 만주국 경성주재 명예총영사와 중추원 참의ㆍ총력연맹 후생부장을 역임한 경성방직의 김연수가, 미국 휠라헬리콥터학교 조정과를 졸업하고 군수산업에 몸담았던 신용욱이, 태창방직의 백낙승과 조선비행기공업의 김정호 등이 일제를 도와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죄목으로 줄줄이 체포됐다.


해방 이후 그렇잖아도 재계는 반민법이 제정될 즈음부터 과연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인지 예의주시해오고 있었다.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그 처벌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판단, 미국으로 도주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의 간판이 내걸린 지 사흘 만에, 종로 사거리 화신백화점 별관 4층에 자리한 화신백화점 박흥식의 집무실 안으로 특조위 조사관들이 들이닥쳤다.


바로 그 몇 시간 전, 특조위 제3조사위(일반 사회방면) 오범영 부장은 조사관 이덕근을 불러 서울시경 형사대 15명을 지휘해 박흥식을 체포해오도록 지시했다. 조사관 이덕근은 서울시경에서 차출해온 형사대를 이끌고 화신백화점 별관 집무실로 들이닥쳐, 비서실 문을 열고 쇄도해 들어갔다. 저지하는 비서들에게 "특조위에서 왔다"는 말을 남기고 사장실로 곧바로 들어서자, 박흥식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일손을 멈추었다.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챈 박흥식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간청한 다음 사장실에서 잠깐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조사관 이덕근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미 형사들을 출구마다 배치했기 때문에 사장실 바깥으로 나와 비서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박흥식은 비서들과 구명책을 논의한 뒤, 이미 사장실을 비운 다음이었다. 잠시 몸을 피한 후 사태가 가라앉기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뒷문 비상구를 통해 화신백화점 옆 골목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뒷골목에도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어 그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박흥식은 특조위에 연행돼 간단한 예비 심사를 마친 뒤, 곧바로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특조위는 그 날 이후 박흥식에 대한 반민법 위반 사항에 대한 조사에 착수, 47일 만에 무려 6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조사 기록을 갖춰 기소했다. 조사 기간 동안 마포형무소 독방에서 모든 것을 체념한 박흥식은 "나는 반민법 제1조 해당자부터 차례로 검거될 줄 알았는데 내가 제일 먼저 잡혀온 것을 보니 내가 너무 이름이 났나보다"라며 씁쓸해했다.


그러나 구속된 지 103일 만에 박흥식은 재판부에 의해 병보석으로 유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반민자' 척결 의지가 없었던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반민특위 위원을 비롯한 정부 요인 암살 음모였다. 이 암살 음모 사건은 친일 고위 경찰 노덕술 등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사주한 독립운동가 백민태가 먼저 자수하는 바람에 미수로 그친 사건이었다.


두 번째 음모는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승만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하여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소장파 의원들을 간첩 혐의로 몰아 구속했다. 이어 군중을 동원한 반공대회를 열어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민특위 정문까지 습격하는 사태까지 벌였었다.


다음날 이 습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친일파 최운하(서울시경 사찰과장)가 특위에 체포되자 내무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가 특위에 최운하를 당장 석방하지 않을 경우 실력행사를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특위가 최운하의 석방을 끝내 거부하자 이들은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반민특위 사무실을 급습하게 해 특경대장 오세운 등 특경대원 35명을 무차별 폭행하고 중부서에 감금시켜버렸다.


국회는 곧바로 반민특위 원상 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반민특위 습격은 대통령인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히며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돼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시켰다고 발표했다. 국회는 이승만을 압박하기 위해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추진시켰으나 뒤이어 발생한 김구 암살사건으로 말미암아 논의를 이어가지 못한 채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무장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의 습격을 받는 등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방해 공작 끝에 그 해 여름 그만 강제 해산됐다. 그동안 반민특위에서 진행했던 업무를 대법원과 대검찰청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해방 이후 반민자에 대한 숙청 작업은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한 채 시나브로 끝나고 말았다.


박흥식 역시 재심 청구 등을 통하여 형집행 정지로 슬그머니 풀려나 다시금 경제계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경제계로 복귀한 그는 자신이 반민특위에 붙잡혀 있던 짧은 공백을 만회하기라도 하는 듯이 화신백화점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녔다.
사실 반민특위는 해방과 더불어 이미 예견돼 있었던 통과 의례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면서 일제에 빌붙어 협력했거나, 축재한 자를 어떤 형태로든지 단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됐던 박흥식은 곧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1994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찾아오는 사람마다 자신이 친일파가 아니었음을 이렇게 항변하곤 했다고 한다.


"나 우리 민족에게 욕보인 것 없어요. 우리 민족에게 해를 입힌 것 없어요. 나 친일파라고 매도되는 것이 평생토록 한이 되고 있어요. 상인으로서 보잘 것 없는 민족자본을 일으켜 조선 상권을 형성하려고 일본인들하고 친하게 지냈다고 친일파라면, 일제 강점기 시대를 지나온 이 나라에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럼 어떤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나도 (일제에) 한이 맺혀있는 사람이올시다."


하기는 식민 지배 하에서 일제와의 협력을 거부한 채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불가능할 일이었다. 지금과 같이 자유경제 속에서도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간다고 정경유착이 끊이지 않을진대 하물며 전쟁을 치르고 있는 통제경제 속에서 정치권력과 등을 진 채 화신백화점과 같은 대기업을 경영하기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통제경제 속에서 한인 기업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일제에 협력을 하느냐 아니면 기업을 그만 접느냐 하는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해방 이후 반민특위는 박흥식과 같은 기업가들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통과해온 경제계가 반드시 한번쯤은 치러야할 수난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박흥식이 일제에 협력하기 위해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또 그가 금명함(?)을 들고서 총독부를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을 정도로 일제와 가까웠던 것도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박흥식이 그와 같이 일제에 협력을 한 데에는 오직 화신백화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박흥식은 그처럼 일제에 협력하면서도 한편으론 대전형무소에 갇힌 도산 안창호 선생을 도운 이력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경성방직의 김연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김연수가 이끌었던 경방은 누가 뭐라 해도 민족자본의 첫 결집체였다. 그의 주도 아래 경방은 '일본말 쓰지 않기, 조선인만을 채용하기'를 내부 사규로 정하고, 일본의 막대한 자본과 맞서 그야말로 혈투 끝에 일본의 거대 공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산업으로 키워냈다.


훗날 그가 만주로 첫 해외 진출을 시도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재정 부족과 비정규 학교 기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인 교육기관인 동광학교를 인수해 시설과 교원을 확충해서 정규 학교인 동광중학교로 승격시켜 기부한 것이랄지, 조국을 떠나 만주를 떠돌며 품팔이로 겨우 유리걸식하며 살아가는 동포들의 처지를 보다 못해 대대적인 농장 사업을 펼쳐 장착시킨 사례가 그 좋은 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연수 또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기업경영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그가 경방의 성공을 발판 삼아 만주에 진출해 남만방적과 거대한 농장을 개척한 삼양사, 그리고 광활한 삼림개발 등으로 그의 기업 세력은 만주 대륙으로까지 크게 뻗어나갔다.


바로 그럴 즈음 하필이면 만주국 명예총영사 직함을 갖고 있던 조선상업은행장 박영철이 갑자기 뇌내출혈로 쓰러지면서 그가 쓰고 있던 감투가 자연스레 김연수에게 떠맡겨진 것이 그만 화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일제에 빌붙어 축재를 한 박흥식과 김연수와 같은 기업가들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그들 역시 그러한 수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하더라도 반민특위 1호가 과연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식이라면 마땅히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의 순서여야 마땅하지 않았는가 싶다. 비록 십 수 년 전에 이들이 타계하고 말았다하더라도 그들 을사오적부터 이름을 불러야 옳았을 거란 얘기다. 그들 다음에 박흥식과 김연수와 같은 기업가들을 열거해도 얼마든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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