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뮤지컬, 영화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 그 와중에 20년간 써 온 배우일지가 담긴 책 <행복의 발명>을 출간했고, 제대로 잠도 못 자는 스케줄을 쪼개 틈틈이 작업해서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자작곡만 40곡이 넘는다. 올해로 마흔넷, 배우 유준상의 이야기다. 이쯤 되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정말 지치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게 정말 재밌을까. “재미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못해요. 일단 시간도 잘 가고 재밌어요. 연기는 이미 있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배우로서 보여주는 거지만, 책이나 음악은 제 자신을 보여주는 거니까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언제 이런 음악을 만들었지? 오, 이건 잘했네’라는 생각이 들다가 몇 개월 후에 들어보면 ‘별로네’라고 느낄 때도 있고, 만약 그때도 좋으면 ‘오 이게 되게 좋네’라고 생각하는 거죠.”
인터뷰가 진행된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수프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바쁨에도 불구하고 손수 메모지를 준비해 꼼꼼하게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하는 모습은 유준상이기에 가능한 그것이다. 그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은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에게만 들려주는” 자작곡을 미니콘서트처럼 들려주거나 자신이 직접 쓴 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에서도 묻어나온다. 영화 <알투비: 리턴투베이스>에서 그가 연기한 우직한 이철희보다 정지훈이 맡은 피 끓는 청춘 정태훈에게서 유준상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래서다. “극 중에서 이철희도 정태훈을 보면서 자기 옛날 모습을 떠올리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유, 내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훈아, 그냥 네가 열심히 해줘라’라고 말했죠. 하하.” 처음 이철희라는 인물을 접했을 때는 “밋밋하고 평범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유준상은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는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는다. “일부러 뭔가 바꿔서 새롭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FM대로 군인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점점 빠지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까지 제가 군인인 줄 알았어요. 실제 부대에 계신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유준상 씨가 진짜 군인이라고. 부대 사람들이 오히려 배워야 된다고. 하하.” 어떤 작품, 어떤 역할에서도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와 재미를 찾고 그것을 발견한 이후에는 놀라울 정도로 몰입하는 유준상이 ‘오랫동안 들어왔던 음악들’을 추천해왔다. 한 마디로, 믿고 들어도 되는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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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uckshot LeFonque의 <2집 Music Evolution>
“주로 앨범을 통째로 듣는 편”이라는 유준상은 ‘Wasineveritis’와 ‘James Brown, Pt. 1 & 2’를 동시에 첫 번째 추천 곡으로 꼽았다. “2번 트랙 ‘Wasineveritis’와 3번 트랙 ‘James Brown, Pt. 1 & 2’를 한 곡처럼 연결해서 들어보시면 더 좋아요. 그래야 두 번째 곡의 맛이 살거든요. 1990년대에 만들어진 곡인데도 지금에 비해 사운드가 전혀 뒤지지 않아요. 지금도 이런 사운드를 낼 순 없을 거예요. 마샬리스를 좋아해서 꾸준히 노래를 듣고 있다가 이 앨범이 나왔을 때 바로 구입했는데 특히 혼자 드라이브할 때 많이 들었던 곡이에요. 우리한테 많이 알려진 노래 ‘Another day’가 수록된 명반이라고 할 수 있죠.”
2. P.Diddy의 < I'll Be Missing You >
“디디 노래도 운전하면서 정말 많이 들었어요. ‘I'll Be Missing You (Feat. 112)’는 정말 오래된 노래지만 지금 들어도 참 좋은 곡이죠. ‘Every Breath You Take’ 리메이크곡이라는 걸 알고 들었는데도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리메이크가 될 줄은 몰랐거든요. 영어도 안 되는데 속사포 랩을 많이 따라 했죠. 가사도 안 외우고 가사집도 안 보고 그냥 혼자 중얼중얼했는데 나름대로 맛이 있더라고요. 하하. 이때의 디디 음악들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내가 정말 좋은 명반들이 많은 시대에 살았다는 게 참 좋아요. 요즘엔 그런 명반들을 찾기 힘들잖아요.”
3. 봄여름가을겨울의 < Best of the Best 연주 >
“이 노래 알아요?” 손수 자신의 휴대폰으로 ‘열일곱 그리고 스물넷’을 들려주며 유준상이 물었다. 몰라도 상관없다. 곡의 도입부를 듣는 순간, 앨범이 발매된 시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숫자가 될 테니 말이다. “지금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도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유준상의 조언 그대로다. “‘열일곱 그리고 스물넷’은 봄여름가을겨울의 2집에 수록된 곡인데, 당시 이 앨범이 정말 좋았어요. 명반 중의 명반이라고 할 수 있죠. 앨범 재킷 사진도 예쁘고, 곡도 세련되게 편곡돼있고 감성도 넘치잖아요.”
4. 이영미의 <1집 Love Universe>
“‘우리 사랑 떠나간다 (Feat. 이하늬)’는 뮤지컬 배우 이영미 씨와 제가 함께 만든 곡이에요. 혼자서 웅얼 웅얼거리면서 만들다가 ‘이 노래 어때?’라고 물었더니 좋은 것 같다고 해서 아는 분께 편곡을 맡겼어요. 제가 쓴 가사인데도 ‘과연 이게 내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좋더라고요. (웃음) 비록 지금은 많이 알려진 곡이 아니지만 언젠가 애니메이션이나 사극 OST로 쓰려고요. 이영미 씨가 노래를 정말 잘해요. 이 친구도 아직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꼭 알려질 거라 믿어요. 영미야, 좀만 참아라. 하하하하.”
5. Yann Tiersen의 <아멜리에 (Amelie From Montmartre) OST>
“학교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이 곡을 가지고 즉흥극을 만들게 했어요. 안톤 체홉의 갈매기에 등장하는 극 중 인물을 아이들에게 한 명씩 부여했죠. 너희들이 그 사람이라고 믿고 움직이라고. 그런데 그 움직임이 이 음악과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결국, 발표회까지 열었어요. 저한테도 재밌는 경험이었고 아이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고 관객들도 많이 좋아하셨어요. 그 이후로 계속 이 노래를 듣게 됐어요. 이 노래를 들으면 아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생각나거든요. 정말 아름다워요. 아이들이 무용을 배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걸 보면 너무 부럽죠. 우스갯소리로 이 아이들의 나이를 훔치고 싶다고 제 일지에 쓰기도 했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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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추천하며 유독 ‘오래된 곡이지만 지금 들어도 세련된 곡’이라는 말을 많이 했던 유준상은 자신이 만든 음악 역시 그렇게 들려지길 바란다. “제가 만든 곡 위주로 수록된 앨범을 내고 싶어요. 물론 잘 되면 좋겠지만, 그냥 시류 같은 거 따지지 않고 제 정서를 담아서 낸 앨범이 사랑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요. 50대, 60대에도 음악을 계속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이거 할아버지가 만든 거야?’가 아니라 ‘이걸 만든 사람이 진짜 50대라고?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드라마, 뮤지컬, 영화라는 일의 영역의 경계를 지워버린 유준상이 이제 세대의 경계마저 허물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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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가온 thir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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