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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30>해방 이후 혼란에 빠진 조선중공업

시계아이콘읽는 시간4분 30초

[아시아경제 ]


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30>美군정, 버린자식 취급···표류하는 조선중공업
-태평양전쟁으로 전성기 맞아
-공장 내 좌익세력 커지고 일감부족·인력유출로 위기 맞아


[한국기업성장史]<30>해방 이후 혼란에 빠진 조선중공업 1980년대 후반 대한조선공사(옛 조선중공업)가 위치한 부산 영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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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부산은 '제조업의 공동화'로 몹시 신음해야 했다. 전쟁특수로 오랫동안 불야성을 이뤘던 공장들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멈춰 섰고, 기술자들이 떠나간 자리는 다시 메울 길이 없었다. 일본 재벌 미쓰이물산의 계열사로 설립된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방직㈜와 함께 부산의 지역 공업을 이끌었던 조선중공업㈜의 사정 또한 결코 다르지 않았다.


철강으로 선박을 건조한 국내 최초의 조선소인 부산의 조선중공업은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1000t급 이상의 대형 철선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전문 조선소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37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설립됐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시점인 1941년에는 자본금 700만원(지금 돈 약 8400억원)에 선박 건조능력 연간 2만t, 수리능력 연간 30만t의 설비능력을 갖췄다.


조선중공업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시설을 확충할 수 있었던 것은 군수공업의 확충이라는 일본 군부의 보이지 않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 시설이 빠른 속도로 확충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중공업은 선박 건조 실적이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 경제권 전체의 생산 현장에 원료 및 자재 조달이 극도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서 철판 한 장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렇듯 좀처럼 일감을 구하지 못해 고전하고 있던 조선중공업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 것은 태평양전쟁이었다. 미국과의 전면전을 태평양에서 벌인 일본은 대대적인 선박 양산 계획에 나섰다. 운송 확충에 전쟁승리의 사활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전시 계획조선'을 수립하면서 조선공업을 중점산업으로 지정해 선박 건조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조선중공업은 돌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제의 계획조선에 따라 선박 건조를 활발히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획조선을 수행하기 위한 시설 확장도 일본 해군성의 주도 아래 다시금 이뤄졌다. 매립 부지에 조선 및 조선기계 관련 각종 설비공장을 비롯해 노동자를 수용할 기숙사 따위가 건설되었다. 시설 확장에 필요한 자금은 주주 총회를 거쳐 만들어졌는데, 기존 자본금 700만원에서 1500만원(지금 돈 약 1조8000억원)으로 증자가 결정됐다. 이는 자본금 규모면에서 그 때까지 국내 최대 기업이었던 조선방직을 앞지르는 사상 최대로, 해방되기 전 마지막 회기 결산이었던 1945년 3월 기준 조선중공업의 자산 규모는 3100만원(지금 돈 약 3조7200억원)에 달했다.


그런 결과 조선중공업은 단순히 조립공장의 수준을 넘어 센박엔진을 비롯한 핵심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1943년에는 F형 전시 표준선의 주기관인 600마력 디젤엔진의 보조기관을 자체 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2000t급 전후 D형 전시 표준선의 주기관인 1200마력 증기기관(피스톤엔진)의 제작이 가능하게 됐다.


그밖에 기술 인력 확충이라는 면에서도 조선중공업은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1937년 설립 당시만 해도 현장 직공을 포함한 전체 인원은 채 100명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인 기술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 계획조선을 수행하면서 현장 직공을 제외한 조선중공업의 기술자 수는 총 179명까지 늘었다. 이 가운데 상급 기술자는 39명, 하급 기술자가 140명에 달했다.


주목할 점은 조선인 기술자의 약진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상급 기술자가 일본인 34명, 조선인 5명, 하급 기술자는 일본인 60명, 조선인 80명으로, 상급에서부터 하급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기술자의 수가 크게 늘었다. 조선인에 의해 기술 대체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감도 끊이지 않았다. 전시 계획조선에 따라 일본 해군함정본부로부터 선박을 할당받기 시작하면서 건조 또한 눈에 띄는 약진을 보였다. 할당받은 선박 건조가 완료되면 역시 당국에 의해 결정된 선주에게 인도하는 식이었다.


이같이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조선중공업에 할당된 선박은 모두 12척이었다. 1100톤급 일반형 1척, 3840t급 전시 표준선 1D형 2척, 2350t급 2D형 5척, 1470t급 F형 4척으로 합계 1만8450t이었다. 이 가운데 1100t급 일반형 선박은 1940년 일본우선이 발주한 화물선이었는데, 그동안 자재 부족으로 건조가 지연되다가 뒤늦게 착공된 것이었다.


그러나 전시 계획조선이 이뤄지고 있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에도 조선중공업은 원료 및 자재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형 선박일수록 선박 건조가 지연되면서, 결국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3840t급 1D형 2척 가운데 1척과 2350t급 2D형 5척 가운데 1척은 미처 진수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중공업 역시 여느 기업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단절과 혼란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최고 경영자를 비롯해 일본인 전원이 귀환한 가운데 관리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부산 영도경찰서 치안관 박상길에 이어 조선중공업의 건축공사장에서 십장(노동자 10명 정도의 관리자) 노릇을 하던 김재련이 미군정청에 의해 정식 관리인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관리대책위원회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해방 이후 관리대책위원회 위원장이 1달에 한 번씩 바뀌는 혼란이 거듭됐기 때문이다. 그 같은 혼란의 원인을 '대한조선공사 30년사'는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공장 내 좌익의 준동과 함께 미군정청의 안이한 대응을 꼽은 것이다.


여기에 조선소와 전혀 관련이 없는 바깥사람들이 연이어 관리위원장에 임명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초대 위원장 박상길은 경찰이었고, 미군정청의 승인을 받았던 2대 위원장 김재련은 건축공사장 십장으로 조선중공업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바깥사람들이었다. 공장 내 혼란이 수습되지 않자 미군정청은 조선중공업 직원 가운데 정우조를 3대 위원장에 임명하면서, 비로소 진정 기미를 보였다는 기록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무튼 해방 직후 조선중공업은 관리대책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가운데 한국 내 적산기업을 미군정청으로 귀속시키는 과정에서 동양척식의 후신인 신한공사의 관리 체제에 편입되고 만다. 1950년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재출범하기까지 신한공사에서 파견한 최고 경영자가 조선중공업을 이끌었다.


이때까지 조선중공업이 보유한 주요 설비는 선박 건조 시설인 선대(船臺) 5기, 수리용 선거(船渠) 2기를 중심으로, 각종 크레인 25대, 조선 및 조선기계 관련 각종 부속공장 등이었다. 선박 건조는 최대 3000t급 선박 3척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었고, 수리용 선거는 최대 7000t급 선박의 수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중공업의 생산 능력을 미군정청은 보다 낮게 보았다. 일본이 철수한 가운데 자재난, 인력난 등 생산 조건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건조 능력의 경우 연간 최저 6000t에서 1만6000t, 수리 능력은 연간 20만t에서 30만t 정도로 산정했다. 가장 구체적으로 산정한 자료에는 한 달 평균 460t의 건조와 1만5800t의 수리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것으로 봤으며, 종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매월 480t의 건조 실적과 1만7000t의 수리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한데 해방 직후 조선중공업은 보유한 생산 능력을 상당 기간 보여주지 못했다. 미군이 6000t의 선박 건조를 전제로 제시한 종전 시점에 시설은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기의 공습으로 입은 경미한 피해를 제외하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인력은 일본의 철수로 그 단절이 심한 편이었다.


조선중공업의 경영진은 모두가 일본인으로, 앞서 얘기한대로 해방 직후 전원 철수해 귀환했다. 거대한 종합기계공장이나 다름없는 조선소는 전문성이 높기 때문에 최고 경영인조차 엔지니어인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중공업 역시 역대 최고 경영자가 전부 엔지니어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일본인들의 철수로 인한 경영 공백은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기술자들의 공백 또한 컸다. 조선중공업의 경우 창립과 함께 공장 내에 기술양성소를 설치한 결과 한국인 기술자의 성장이 두드러졌던 게 사실이다. 그렇대도 일본인의 철수로 기술 인력이 절반 이하로 줄었을 뿐더러, 조선소 전체를 아우르며 이끌어갈 수 있는 상급 기술자의 경우 한국인은 고작 5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술적 공백이 클 수밖에 없었다.


현장 직공들의 공백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해방 전후 조선중공업의 현장 직공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확인 할 길이 없다. 다만 한국 측에서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4000명, 일본 측에서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1700명에서 2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생산 공정에 따라 노동력을 신축적으로 운용하는 조선공업의 특성에 따른다하더라도 해방 전후 조선중공업의 현장 직공은 2000명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해방 직후까지 남아 있는 현장 직공은 고작 300명 남짓이었다. 종전과 함께 일본인 수뇌부가 조선소 경영을 중단하고 종업원들을 대부분 해고한 마당에, 그렇다고 조선소 유지에 뜻을 둔 기술자나 숙련공도 아닌 현장 직공들의 처지로 볼 때 조선소 가동이 멈춘 상황에서 자구책을 찾아 저마다 흩어질 수밖에는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해방 직전까지 2000명에 달하던 현장 직공들 가운데 겨우 300명만이 남은 극심한 단절을 보였다.


핵심 인력인 상급 기술자 또한 그 사이 변동이 있었다. 해방 이후 조선중공업에 남은 상급 기술자는 이성우와 김성권 2명 뿐이었다. 이성우는 오사카공업전문학교, 김성권은 철도전문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 조선중공업에 관리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나란히 부위원장이 됐으며, 조선중공업이 훗날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다시 출범할 때까지 관리인으로 조선소 경영에 참여했다.


어쨌든 경영진과 기술자, 현장 직공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단지 2명의 기술자와 300명 남짓한 현장 직공들만으론 대규모 종합기계공장이랄 수 있는 조선중공업을 종전과 마찬가지로 정상 가동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영 자금과 자재 조달 또한 결코 손쉬운 상황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조선중공업을 재가동시키려는 눈물겨운 노력은 계속되었다. 해방 이후까지 조선중공업에 남아있던 소수의 기술자와 현장 직공들이 자생 의지를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한데 조선중공업의 재가동을 가로막은 건 치열한 공장 내 좌우익 간의 갈등과 더불어 미군정청에서 파견된 감독관이었다. 조선중공업은 미군정청의 현상 유지 정책으로 지정된 공장이었다. 때문에 미군정청의 감독관이 파견돼 주요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청 감독관은 조선중공업의 재가동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예컨대 해방 이듬해 이성우를 중심으로 공장 재가동을 위해 60만원(지금 돈 약 3억3000만원)을 들여서, 해방 전에 침몰한 독일 선박 아넷트호를 인양해 수리할 계획을 세웠다. 수리에 필요한 자금은 조선은행으로부터 900만원(지금 돈 약 50억원)을 융자받기로 돼 있었으나, 미군 감독관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면서 공장 재가동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결국 1948년 제1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조선중공업은 대한조선공사법에 따라 국영기업이 됐다. 대한조선공사의 자본금은 3억원(지금 돈 약 1650억원)이었다. 그 중 80%인 2억4000만원은 정부가 출자했고, 나머지 6000만원은 민간자본을 공모했다.
하지만 조선중공업의 부진은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재출발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값싼 중고 선박이 일본에서 수입돼 들어오면서 선박 건조가 또다시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1950년대 대한조선공사는 국영기업 가운데 최대의 부실기업이었다. 1961년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대한조선공사에 파견된 신동식의 회고는 그 실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하고 있다.


"내가 조선공사에 내려가니 조선소가 풀밭이었다. 잡초가 무성하고, 1950년대 원조 자금으로 산 시설과 기계들은 한 번도 쓰지 않아서 고철처럼 돼있었다. 내가 제일 처음에 한 일은 직원들 전부 모아서 실시한 조선소의 풀 깎기와 청소였다. …조선소 가동을 위해 기존 시설 중 전기 용광로를 이용한 주물 작업을 통해 조개탄이나 구공탄을 때는 난로, 미싱 머리 등을 생산했다. 어쨌든 이를 통해 조선소가 가동됨으로써 조선소 내에 활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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