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스포츠에서 세대교체는 필연적이다. 제대로 이룬 나라나 팀만이 해당 종목에서 강세를 이어나갈 수 있다. 반대의 경우에는 하루아침에 약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올드 팬들에게 옛 버마는 축구 강국으로 남아 있다. 1968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과 공동 우승을 거뒀다. 버마는 1971년 제1회 박대통령배쟁탈아시아대회에서도 한국과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말레이시아, 이란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해 출전한 1972년 뮌헨 올림픽도 빼놓을 수 없다. 1승2패로 비교적 선전했다. 그런데 오늘날 미얀마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175위에 그친다. 아시아연맹 국가 가운데서도 37위로 축구 약소국이 됐다. 미얀마 아래에 위치한 아시아 국가는 파키스탄, 스리랑카, 괌, 마카오 등 9개국(협회) 뿐이다. 세대교체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다. 종목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세대교체는 올림픽을 분기점으로 이뤄진다. 체중 감량 등의 힘든 훈련 과정을 겪는 격투기 종목이 특히 그러하다.
한국 대표팀은 7월 2일부터 8일까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펼쳐지는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농구 세계예선에 출전한다. 선수단 면모를 살펴보면 세대교체의 징후는 뚜렷하다. 10여 년 동안 국가대표팀의 골밑을 책임졌던 김주성(원주 동부)의 빈자리를 경복고 3학년의 이종현이 메운다. 고교 선수가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건 2006년 최진수(고양 오리온스) 이후 처음이다. 프로농구 2011-12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소속팀 안양 KGC인삼공사를 우승으로 이끈 오세근도 세대교체의 상징이다. 최종 명단에는 대학 선수인 김종규(경희대)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국가대표팀 센터진의 세대교체가 제법 큰 규모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셈이다.
세대교체 강행에 다수 농구 팬들은 적잖게 우려를 나타낸다. 당연한 반응이다. 어떤 종목에서든 새로운 변화는 ‘전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실제로 이번 세계예선에서 ‘이상범 호’는 고전할 가능성이 꽤 높다. 대회 뒤 국가대표팀 구성에 대한 팬들의 비난이 빗발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대교체는 어차피 이뤄져야 할 일이다. 세계 예선 1라운드에서 맞붙는 러시아(11위)와 도미니카공화국(25위)은 국제농구연맹(FIBA) 랭킹에서 한국(31위)보다 앞선다. FIFA 랭킹은 특정 나라의 축구 실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자주 시달린다. 농구나 배구 등은 그렇지 않다. 축구는 발로, 농구와 배구는 손으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국가대표팀은 1라운드를 2위로 통과할 경우 앙골라(15위)나 뉴질랜드(18위)와 8강에서 맞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두 나라 역시 FIBA 랭킹은 한국보다 높다. 이번 세계예선에 나서는 12개 나라 가운데 한국보다 FIBA 랭킹이 낮은 나라는 마케도니아(33위)뿐이다. 본선 진출권은 상위 3개 팀에게만 돌아간다. 랭킹만 놓고 보면 획득은 사실상 불가해 보인다. 물론 결과는 부딪혀봐야 알 수 있다.
한국 남자 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하고 있다. 선배 농구인들은 올림픽과 관련해 나름대로 전통을 만들어 놓았다. 국가대표팀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다. 그때는 지역 예선 없이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다. 한국은 조별 리그에서 칠레, 벨기에,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 필리핀 등과 물고 물리는 접전을 펼쳤다. 5개국이 모두 3승2패를 기록한 가운데 국가대표팀은 골 득실차에 힘입어 칠레와 함께 8강에 올랐다. 한국은 8강에서 멕시코에 32-43으로 져 5~8위 결정전으로 밀려났다. 이후 우루과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각각 36-45, 38-39로 패해 출전한 23개국 가운데 8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 출전한 장이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3명의 한국인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또 다른 베를린 올림픽 출전 선수인 이성구는 감독으로 참가했다.
한국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국가대표팀은 13위 결정전에서 싱가포르에 79-92로 져 출전한 15개국 가운데 14위를 기록했다. 당시 코트를 누볐던 김영기는 서울 삼성 코치인 김상식의 아버지로 농구 팬들의 귀에 익은 이름이다. 한국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앞서 출전한 프레올림픽에서 9경기(6승3패)를 치르며 체력을 소진한 탓에 출전한 16개국 가운데 꼴찌에 머물렀다. 당시 선수단에서 8년 전 멜버른 대회를 경험한 건 김영기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11명은 모두 새로운 얼굴이었다. 신동파, 김인건, 방열 등 신세대 농구 팬들도 알 만한 선수들이 이 시기 세대교체의 선봉에 섰다.
국가대표팀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또 한 번 뉴 페이스를 발탁했다. 박한, 곽현채, 이인표, 유희형 등이다. 대회에서 한국은 16개 출전국 가운데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 세대교체를 통해 꾸려진 국가대표팀은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1970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역대 최고 성적인 11위를 기록했다. 신동파는 경기당 32.6점으로 득점 1위에 올랐다. 세계 농구의 판도가 많이 달라진 현재 당시 선전은 평가절하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나름의 경쟁 구조는 존재했다. 남자 농구대표팀의 새 얼굴들이 질 때 지더라도 투지 넘치는 경기를 펼치고 돌아오길 기대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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