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파워女星④]우명자 본부장, 우려를 밟고 더 강해진 그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5분 16초

[파워女星④]우명자 본부장, 우려를 밟고 더 강해진 그녀
AD


[부산=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리 천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 임원 1세대'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입사한 신입 공채들이 '별'을 달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풍(女風)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드리엔 멘델은 <유능한 여자는 많은데 왜 성공한 여자는 없을까>라는 저서에서 직장 생활에는 여자가 모르는 불문율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멘델은 유능한 여성은 많은데 성공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로 "여성이 목표지향적인 남성 사회의 룰을 모른 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관계지향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유능한 척, 강한 척하고 재미가 없어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하면 싸우고, 팀의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최근 사회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채로 입사해 조직에서 '별'을 다는 여성임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임원 1세대라는 점에서 이들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말 그대로 유리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 조직에서 오랜 시간 몸담으며 남성과 당당히 경쟁해 살아남고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여성(女星)들. 유리 천장을 과감히 깨트린 여성 임원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인생 스토리. 20~30대 새내기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한민국 여성 임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한다.<편집자주>

부산대병원 출장소 발령
"그때 만난 1700명 이름,
지금도 줄줄 외울수 있죠"


"'최초' 승진신화 보다
주부대학 첫 기획이 진짜 실적"


이른 더위가 찾아온 지난달 초순의 부산. 사방이 훤하게 트인 사무실에서 만난 우명자 NH농협은행 부산영업본부장은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융서비스 업계의 임원답게 옷차림은 단정했고, 헤어스타일도 깔끔히 손질돼 있었다. 지난해 말 농협 최초의 여성임원으로 선임된 뒤 쏟아져 나온 인터뷰 기사 때문에 첫 만남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세련된 미소와 함께 정중히 건네는 악수는 다정다감하면서 맘을 편하게 했다. 저 미소로 고객들을 대했기에 이 자리까지 왔으리라, 잠시 상념에 젖은 순간.


"안녕하십니꺼, 반갑습니더. 여(여기) 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더."


박력 넘치는 중저음의 목소리와 똑 부러지는 말투, 경상도 토박이 고유의 억양과 아우라까지. 그는 '비주얼'이 주는 선입견을 간단히 뒤집었다. '의외성'은 으레 그렇듯 곧 호감이 됐다. 우 본부장은 수차례 바닥을 드러내는 기자의 찻잔을 매번 친절히 채워줬고, 돌려서 어렵게 건낸 질문에 오히려 정면으로 답해줬다. 세 시간여의 만남은 그렇게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꿈꾸던 모습만 가진 직장은 없다 = 그가 1979년 동주여상을 졸업하고 막 농협에 입사했던 당시, 부산은 산업화의 한 가운데 있었다. 쉽게 말해 '졸부'가 쏟아지던 시기로, 예금통장에 수억원씩 예치해 두는 것은 예사였다. 돈을 내어 달라는 고객 중에는 자기 이름 석자 쓸 줄 모르는 '문맹'도 많았다. 이 경우 창구 직원들은 고객 손을 붙잡고 이름을 한글자씩 써내려갔다. 청구서를 다 작성하고 나면 고객은 예금을 받아 성급히 자리를 뜨곤 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일부는 갑자기 손에 쥔 목돈은 물론, 돈을 찾아간 기억도 잘 간수하지 못했다. 대뜸 창구를 찾아와 "너희가 내 돈을 찾아다가 썼느냐"며 악을 쓰고 직원들을 도둑 취급하기 예사였다. 자신은 인출해 간 적이 없는데 통장이 비어있다는 것이다. CCTV도 없던 때라 앞뒤 정황을 확인할 길도 없었다. 그럴 때는 그저 창구 업무를 마치고 직원부터 지점장까지 고객의 집으로 찾아가는 방법 뿐이었다.


"'사장님, 몇월 며칠날 농협 창구에 오셨죠? 오셔서 오른쪽 칸막이 자리에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셨어요. 날씨 춥다는 얘기도 나눴고요.' 고객이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한 없이 늘어 놓아야했습니다. 그런 일로 한 상사는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어요. 이런 것들은 사실 제가 생각했던 은행일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죠."


우 본부장이 30년도 더 지난 해묵은 얘기를 꺼낸 이유는 '막연히 꿈꾸던 모습 그대로의 직장은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은행에 입사해서 그런일 까지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패기 넘치는 요즘 신입직원들, 하나같이 학력 좋고 똑똑하지만 조직과 이상의 괴리를 좁히는 데 능숙하지 못하다. "그토록 거친 고객들을 응대하는 일도 은행원의 몫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얘길 파릇파릇한 신입들에게 종종 한다.


"어느 직업이던 다르지 않을 겁니다. 꿈꾸던 모습 그대로의 직장은 없어요. 그 괴리감을 이겨내는 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막 입사해서 커피를 타고, 복사를 하는 게 짜증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거쳤던 과정이에요. 하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좀 더 효율적으로 복사하고, 더 맛있게 커피를 내 드리면 그게 다 나의 경쟁력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될 때, 그 모든 디테일을 꿰차고 큰 방향을 결정한다면 그것만큼 완전무결한 게 없거든요."


◆작은 출장소도, 시장 한복판도 좋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자리가 가장 빛났다."


우 본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어느 자리에 서더라도, 그 자리를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다. 동시에 스스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자신감과 믿음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꿈꿨던 것과 다른 일이 닥쳤을 때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것도 우 본부장이 가진 능력중 하나다.


평균 이상의 고과 덕분에 주변에서 누구나 지점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2003년, 우 본부장은 부산대학병원 내에 있는 작은 출장소로 발령 났다. 사무소장 신분이었고, 서운할 수 있는 인사였다. 그러나 우 본부장은 뜻밖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 정말 나는 어떻게 이렇게 행운아인가' 딱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서운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저는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했어요. 부산대학병원은 부산의 대형 3차 진료기관입니다.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의료 종사자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어요. 당시 일하던 의사직 300명, 간호직 500명, 행정직 500명 등 총 1700여명의 임직원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고객들에게도, 저에게도, 그리고 의료계 인사들에게도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맥을 만들 수 있었죠."


출장소는 규모가 작아 1, 2년 뒤 지점장이 되기 위해 거쳐가는 '거점'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우 본부장은 3년 이상 꼭 이 곳에 있겠다고 본부에 요청했다. '부산대학병원'이라는 조직을 완벽히 알고 가겠다는 의지였다. 그렇게 5년을 사무소장 신분으로 지내며 병원의 1700여명 임직원 얼굴을 모두 익혔다. 일부와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낼 만큼 돈독하다. 그리고 평소 관심이 있던 호스피스 교육까지 받았다. 작은 출장소의 사무소장이었지만 1분 1초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2008년 초, 그는 지점장으로 승진하며 부산 충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또 다시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충무동은 자갈치 시장이 있는 곳. 부산의 고유명사격인, 억센 '자갈치 아지매'들이 주요 고객이다. 차 한잔 하며 손님을 상담하는 시내지점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러나 본부의 이 같은 결정에 우 본부장은 또 다시 감동(?)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이면 정말 상징적인 곳입니다. 그 곳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부산을 움직이는 분들이예요. 이들과 알고 지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감사했습니다. 이런 기회가 또 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죠."


실제로 그랬다. 그동안 농협 본부와 병원 내 출장소에서 일하며 체득했던 것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흔히 뱃사람에 대해 '어업'을 하는 단순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엄청난 안목으로 베팅을 하는 승부사들"이라고 우 본부장은 말했다. 세상을 사는 법, 돈을 버는 법, 사업을 일으키는 법을 그들에게 배웠다. 그리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익숙해지던 2년 후, 우 본부장은 부산 시청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우 본부장이 지나온 모든 과정이 항상 그랬지만,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부산시청지점이라는 영업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간 주부대학 = 그러나 우 본부장이 본인의 이력 가운데 가장 최고로 꼽는 것은 '최초' '첫' 과 같은 기록적인 승진 이력이 아니다. 바로 여성들의 교육에 대한 갈망을 풀어준 '주부대학'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졌다."


우 본부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검정고시로 학력을 딸 수 있는 국내 주부대학 시스템의 시초는 1985년 부산 동래 농협의 주부대학이다. 이 수료과정은 수익의 30% 이상을 지역 환원사업에 써야하는 지역농협의 과제 중 하나로 우 본부장이 직접 기획하고 다듬어 내 놓은 프로그램이었다. 산업화 후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고, 때는 놓쳤지만 배움의 기회를 갖고 싶어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생각해 낸 것이었다.


구태여 자랑하지 않았지만, 사무실 한켠엔 그런 흔적이 가득했다. 1995년 농협주부대학유공, 1998년 홍보업무추진유공, 2000년 종합업적우수ㆍ농정활동유공, 2009년 농정활동유공, 2012년 2월 우수경영자상까지. 내부 실적과 외부 활동을 가로지르며 "그 자리에서 가장 빛난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우 본부장은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언뜻 봐도 호리호리해 보이는 그의 몸매는 처녀시절 그대로다. 48kg의 몸무게를 항상 유지한다고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좋은 올리브유로 화장을 깨끗히 지우고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는 꼭 사과를 한 개씩 먹는다. 20년째 유지해온 '건강관리 습관'이다. 마사지 같은건 따로 받지 않는다. 딱 한 번 관리실을 찾아가 봤다는 그는 '두 시간여를 꼼짝앉고 누워있는 건 고문같았다'는 체험담을 전했다.


◆퇴직 후 하고 싶은 일은... = 만나자마자 느꼈던 우 본부장의 의외성은 인터뷰 말미에도 발휘됐다. 퇴직한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첫 대답은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부산대학병원 출장소에서 받았던 호스피스 교육을 활용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것.


두 번째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장례지도사'가 돼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 배웅을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염사 교육도 이미 받아 놨다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세 번째 대답은 '로비스트'. 점입가경이다. 물론 법적으로 국내에서도 인정이 된다는 전제하에. 협상이야말로 그가 이제껏 가장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는 재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 본부장은 30여년 한 자리에서 한 우물을 팠지만, 그 스스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퇴직 후에도 그 에너지를 쏟아내고 싶다는 열정이, 이 '버라이어티'한 인생계획을 그렸을 터다.


인터뷰가 끝난 뒤, 우 본부장은 예정에 없던 점심식사를 권했다. 먼 곳까지 왔는데 맛있는 것을 대접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언뜻 봐도 내공 있어 보이는 복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한 잔 하셔야지요." 제안하며 우 본부장은 슬쩍 기자의 눈치를 살폈다. "날이 덥고, 다음 인터뷰 까지는 시간이 좀 있습니다." 에둘러 답했다. 우 본부장은 시원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사장님, 여기 맥주하고 소주 주이소" 시원한 소맥 폭탄주 두어잔이 돌았다. 아쉽지만 정겨운 식사자리를 마친 뒤, 언젠가 꼭 다시 만날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그와의 술자리마저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김현정 기자 alphag@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