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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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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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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첫사랑은, 미완이다. 첫사랑에 대한 영화 <건축학개론>이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건축사무소에 다니는 승민(엄태웅)이 자신의 첫사랑 서연(한가인)의 집을 지어주는 과정을 담담히, 과거 그들이 대학 새내기이던 시절과 교차하며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금 이곳에서 돌아보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또한, 혹은 당연히 첫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사랑이 현재진행형이 아닌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기 위해선 이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왜 헤어졌는지 설명하기도 어렵게, 불현듯 불가해하게 다가온다. 승민이 서연의 집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그래서 그 미숙했던 이야기를 끌어안고 나름의 방식으로 완결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2003년 <건축학개론> 초고를 쓰고 영화 크랭크인에 들어간 지난해까지 “30대 전부를 <건축학개론>을 쓰는데 보낸” 이용주 감독은 그래서 승민을 닮았다. 실제 건축학과 출신에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가 자전적 이야기를 썼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신지옥>이라는 탁월한 공포물로 장편 데뷔를 했지만, 실제로는 <건축학개론>으로 데뷔를 계획하고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그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건축을 마음에서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의미를 지닌다. “영화를 안 했으면 계속 건축을 했을 거예요. 적성에도 맞았고. 더 큰 애정의 대상이 생겨서 그걸 떠난 거죠.” <건축학개론>이 많은 관객에게 첫사랑에 대한 벅찬 송가가 될 수 있다면, 이용주 감독 본인에겐 첫사랑 같던 학문에 대한 송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송가여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곳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용주 감독을 영화로 이끈 다음의 영화들은, 그 현재진행형의 사랑을 만든 첫 만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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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1. <플란다스의 개> (A Higher Animal)
2000년 | 봉준호

“단편영화를 찍고 나서 장편영화의 연출부에 들어가야지 생각하다가 만난 영화예요. 나중에 비디오테이프에 복사한 다음에 할 일 없고 답답할 때마다 틀었어요. 그냥 20분만 보다 말기도 하고. 그렇게 한 300번은 봤을 거예요. 그 땐 그냥 재미있다고 봤는데 나중에 영화를 알고 보니까 정말 잘 만든 영화더라고요. 그 때 감독 이름이 봉준호라는 걸 알고 <살인의 추억> 연출부에 갔어요. 사실은 원제인 <날 보러 와요>만 보고 <플란다스의 개> 같은 영화를 기대하고 갔는데. 하하.”


흥행 감독의 흥행하지 못한 비범한 데뷔작을 보았다는 건 영화 팬들에게 큰 자랑이다. <플란다스의 개>로 봉준호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시간강사인 윤주(이성재), 경비실 경리직원 현남(배두나)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교차를 통해 아파트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한국 사회의 수많은 모순을, 하지만 코믹하게 직조하는 감독의 솜씨는 탁월하다. 특히 영화 막바지, 뇌물로 교수가 된 윤주와 직장을 잃은 현남을 비추면서도 세상의 부조리에 냉소하기보단 함께 씁쓸해하는 태도는 공감의 진폭을 더욱 크게 한다.

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2.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1998년 | 허진호

“내가 감독이 된 다음에 이런 영화 한 편만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작품 중 하나예요. 보고 나서 정말 먹먹한 감정을 느끼고, 감독이 누군지 살피게 되고, <씨네 21> 같은 영화 전문지도 사서 보게 되고. 이런 작품 하나만 찍으면 그걸로 다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시작했어요.”


그 흔한 키스신 하나 없는 멜로 영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사진관 근처에서 주차를 단속하는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과의 사소한 부딪힘 속에서 호감을 느끼고 다림은 정원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연애로 이어지기 전에 정원은 자신의 마음을 애써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흔한 새드엔딩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연애 바로 직전의 두근거림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3. <초록물고기> (Green Fish)
1997년 | 이창동

“건축사무소에 다닐 때 철야를 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날이었어요. 눈이 시뻘개진 상태로 집에 가려는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랑프리 극장에 가서 조조로 <초록물고기>를 봤어요. 사실 한국 영화 잘 안 볼 때라 그냥 아무 거나 보자고 해서 봤는데 영화 막바지에 눈이 뻑뻑한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느라 눈이 아플 정도였어요. 그 때 처음으로 ‘진짜 멋있다. 이런 영화 찍은 감독은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한국 영화를 열심히 봤어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가장 존경하는 감독님은 이창동 감독님이에요.”


이창동 감독이 정말 뛰어난 감독이라면, 이런 엄청난 데뷔작을 찍고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며 자신의 세계를 갱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를 한 막동(한석규)이 찾은 고향은 예전 같지 않은 아파트촌이 되었고, 그가 과거 고향과 가족에게서 느낀 정은 찾을 수 없다. 그가 속한 조직과 보스 태곤(문성근)은 말하자면 유사 가족으로서 의리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듯하지만, 결말에서 알 수 있듯 그로부터 막동은 배신당한다. 이것은 과연 느와르의 한 장면일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다가온 절망일까.


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4.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2002년 | 오시이 마모루

“아직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게 안 풀린 시기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 일본 영화 리스트가 있고 삐삐 번호가 옆에 적힌 걸 봤어요. 거기로 연락하면 불법적으로 테이프를 받을 수 있는 거였죠. 일종의 점조직인데. 하하. 그 때 만 원짜리 테이프로 <공각기동대>를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었죠. 가까운 일본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특히 결말에서 인형사가 쿠사나기와 믹스되어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는 건 벅차더라고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생명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인간의 뇌를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하고, 심지어 기억을 해킹할 수도 있는 미래의 시대를 그린 이 작품에서 프로그램 오류로 만들어진 인공 자아는 하나의 생명체임을 주장하고, 온몸이 사이보그지만 인간인 공안9과 쿠사나기는 그 프로그램이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이 설정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을 지우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5. <매트릭스> (The Matrix)
1999년 | 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어릴 때 극장에서 <슈퍼맨>이나 <레이더스> 같은 영화 보고 나서 ‘뻑 가서’ 나오는 경험 있잖아요. <매트릭스>는 그런 경험을 한 마지막 작품이에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내가 손잡이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경험. 이렇게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게 대단해요. 시나리오가 완벽한 느낌. 공대 출신이라 그런지 그렇게 과학적인 테마로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게 좋아요. 특히 빨간 약, 파란 약을 내미는 장면은 최고인 거 같아요.”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자신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는 호접몽의 고사를 남겼다. <매트릭스>는 여기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트릭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가상이자 꿈이라고 설정한다. 모피어스(로렌스 피시번)를 통해 그 꿈 바깥으로 나온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매트릭스에서 벌이는 초현실적 활극은 그래서 리얼리티를 얻게 된다. 사유가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양철학의 질문을 할리우드적으로 세련되게 요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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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나를 영화로 이끈 영화들

“앞으로 찍을 작품은 온전히 영화감독으로서 찍는 첫 작품이 될 거 같아요.” 이용주 감독에게 <불신지옥>은 “데뷔를 위해 전략적으로 만든” 작품이었고, <건축학개론>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큰 작품이었다. 이미 두 편의 전혀 다른 장르의 작품을 견고한 완성도로 만들었음에도 그가 “영화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불신지옥>이나 <건축학개론> 모두 상상을 통해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일상성이 중요했던 작품이었던 거 같아요. 그와 달리 상상력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영화, 영화이기에 상상력이 극대화되는 <인셉션>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자본이 크게 들어가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요.” “순도 높은 상업 영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그래서 단순히 흥행에 대한 욕구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이런저런 얽매임 없이 지금 사랑하는 대상에 온전히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바람에 가까워 보인다. 첫사랑보다 더한 열정으로, 하지만 그때처럼 미숙하진 않게.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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