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2000년 9월 20일, 대한민국 펜싱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제27회 시드니올림픽 남자 플뢰레에서 대한민국 펜싱 역사상 첫 금메달이 탄생하던 순간이다. 우승이 확정 된 순간 피스트(펜싱경기장 바닥면) 위의 승부사는 거침없는 포효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세기의 검객’ 김영호(41)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한국을 넘어 1896년 근대올림픽 개최 이후 아시아에서 처음 거머쥔 펜싱 금메달이기도 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30여개 중·고등학교에서 펜싱 팀을 창단했고 그 숫자는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하얀 도복의 매력에 빠진 젊은 검객들은 ‘제2의 김영호’를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김영호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펜싱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정상에 우뚝 섰다. 3번의 올림픽을 거치며 느꼈던 생생한 경험은 살아있는 교과서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선수와 코치로 오랜 시간 대표 팀과 함께 해 온 그는 이제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펜싱 보급화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11일 김영호가 총감독으로 몸담고 있는 한남동 로러스 펜싱클럽에서 그와 마주했다. 런던올림픽을 200여 일 앞두고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김영호의 눈빛은 여전히 펜싱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잊지 못할 감격의 순간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김영호는 금메달 가능성을 높게 봤다고 했다. 이전에 그랑프리 대회를 4개 석권하고 세계선수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던 그는 3번째 도전하는 올림픽 무대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당시 펜싱협회는 색깔과 관계없이 올림픽 메달 목표를 1개로 잡았다. 앞선 경기에서 남자 에페의 이상기가 동메달을 따내자 김영호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줄었다.
“상기형이 동메달을 따니까 협회에서는 이제 됐다고 마음 비우고 시합을 뛰라고 했어요. 당시 김운용 IOC부회장님이랑 장창선 선수촌장님이 경기도 안보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짜증이 확 나더라고요. 아직 게임도 안했는데...”
주목받지 못했던 김영호가 4강까지 승전보를 이어가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4강에서 드미트리 체브첸코(러시아)를 한 점차로 힘겹게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 상대는 당시 세계랭킹 1위를 자랑하던 랄프 비스도르프(독일).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오른 김영호는 자신감이 넘쳤다.
“결승 들어가기 전에 금메달이라고 생각했어요. 14-11로 이기고 있는데 심판들이 계속 점수 인정을 안 해주더라고요. 펜싱은 예의가 바른 운동이라 심판이 인정 안 해도 무조건 수긍해야 돼요. 결국 3점 허용하고 14-14 동점까지 갔죠. 마지막에 정확한 동작으로 딱 쐈는데 그 선수가 마스크를 벗고 악수를 청하더라고요. 심판은 아직 판정도 안했는데. 어쩔 수 없이 심판도 그때서야 인정을 했죠.”
아시아 최초이자 올림픽 사상 첫 펜싱 금메달은 예상보다 파급효과가 컸다. “원래 올림픽은 세계 펜싱협회 회장밖에 메달을 못 걸어요. 저는 김운용 부회장님이 메달을 걸어줬는데 사람들이 다 놀랐죠. 사전에 펜싱협회 회장이 제안했대요. 이긴 쪽에서 메달을 걸고 지는 사람은 꽃다발을 걸자고요. 덕분에 제가 한국 귀국할 때 1호로 공항 나와서 환영 받았어요.”
◇ 올림픽 금메달은 운명이었다
김영호는 충남 논산 연산중학교 1학년 때 육상부로 처음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연산중학교에는 시골 중학교로는 유일하게 펜싱부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하얀 도복의 매력에 사로잡힌 그는 육상부 코치의 반대를 무릅쓰고 펜싱부에 가입한다. 김영호는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펜싱을 시작한 순간부터 10년이 넘게 흐른 올림픽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넘쳤다.
1990년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 된 김영호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시작으로 올림픽 무대와 인연을 맺는다. 비록 예선 탈락에 그쳤지만 소중한 경험은 훗날 그를 정상에 올려놓는 밑거름이 된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두각을 나타낸 김영호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올림픽 첫 메달에 도전한다.
본인 스스로도 전환점이라고 말한 애틀랜타올림픽은 그에게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다. “원래 애틀랜타 때 금메달을 땄어야 돼요. 96년도에 기술이 최고였으니까. 8강에서 푸치니(이탈리아)랑 맞붙었는데 그 경기만 이기면 4강, 결승 상대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수들이었죠. 13-11로 이기고 있었는데 너무 자만했던 것 같아요.”
역전패로 8강에서 고배를 마신 김영호는 극심한 절망감에 빠진다. 그는 “분이 안 풀려서 칼도 다 부러뜨리고 밤새도록 술만 마셨다”고 했다. 한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김영호는 장영수 당시 펜싱협회 회장의 도움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재도전을 시작한다. 1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거듭한 그는 1997년 남아공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개인적으로 올림픽 금메달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세계선수권 결승이에요. 아시아에서 처음이었으니까. 세르게이 고루비츠키(우크라이나)랑 붙었는데 얼마나 움직였는지 쥐가 나서 다리가 안 움직였어요. 옷핀으로 다리를 계속 찔렀는데도 피가 안 나더라고요. 1-10으로 지고 있으니까 상대편이 얕잡아봤나 봐요. 중간에 몸이 부딪혔는데 나를 끌어안고 블루스를 추는 거야. 그 때부터 오기가 생겨서 이를 악물고 뛰니까 쥐가 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핀으로 얼마나 찔렀는지 도복 바지가 피로 빨갛게 물들었어요. 붕대로 감고 뛰었는데 아픈 줄도 몰랐죠. 10-10 동점되고 한 점차로 계속 따라가니까 관중들이 난리가 난거에요. 결국에는 14-14까지 가서 마지막에 칼을 멋있게 찔렀는데...아쉽게 졌죠.”
비록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눈부신 성과였다. 한국 펜싱 사상 세계선수권 첫 개인전 은메달이었다. 김영호는 “아마 그 때 금메달을 땄으면 시드니올림픽은 출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20세기 마지막이었던 시드니올림픽 8강에서 그는 고루비츠키와 다시 맞붙는다. 당시 3년 연속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고루비츠키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절치부심 설욕전을 기다려온 김영호는 상대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14-0까지 앞서 나갔는데 그 선수가 어렵게 1점을 따더니 금메달 딴 것처럼 좋아하더라고요. 결국 제가 15-2로 이기고 그 선수는 곧바로 은퇴해 버렸어요.(웃음)
◇ 전설의 승부사가 후배들에게 바란다
김영호가 펜싱을 통해 걸어 온 길은 언제나 전인미답의 경지였다. 본인도 “올림픽 3번을 거치며 스스로 개척했다”고 말한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그는 은퇴라는 말이 무색하게 곧바로 코치로 변신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선수촌을 떠나기 전까지 후배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며 열정을 쏟았다. 선수와 코치로 대표 팀에서 19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일까.
“선수촌에 있으면서 쉰다는 생각을 하면 안돼요. 각종 대회를 경험하면서 비행기 5번 타면 1년이 갔구나 생각하는 거죠. 러시아나 프랑스에 가면 선수촌 안에 학교랑 집을 다 갖춰주고 가족들이 살 수 있게 해줘요. 저희는 아내나 가족들을 만날 시간이 없어요. 유럽에 가보면 그게 참 부럽더라고요. 선수층도 우리가 100명이면 프랑스는 10만 명, 중국은 100만 명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나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선수층도 얇은데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게 정말 대단한 거죠. 그만큼 선수들이랑 코치들도 열심히 하고요.”
펜싱은 현재 런던올림픽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발전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해 9월부터 오는 4월 말까지 각종 국제대회 성적을 합산해 올림픽 출전 자격을 획득한다. 남녀 각각 3명씩 정예멤버를 구성해 단체전과 개인전을 치른다. 김영호는 “이번 올림픽 메달 전망이 밝다”고 했다. 이어 “남자 사브르와 여자 플뢰레는 잘만 맞으면 대박을 칠 가능성도 높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선배로서의 조언도 잊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신과 기술을 믿으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거예요. 첫째 지금부터는 부상을 조심해야 돼요. 부상당하면 4년 동안 쌓아온 것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요. 둘째는 욕심내지 말고 가진 기술 그대로 경기를 해야 돼요. 지금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 보다 내가 가진 것을 확실히 입력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기술은 연마해서 4년 후에야 나오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음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김영호가 생각하는 펜싱의 전성기는 30대 초반이다. 오랜 경험을 거치면서 얻은 결론이라고 했다. “펜싱은 전성기가 늦어요. 제가 금메달 딸 때가 31살이었어요. 전에 선배들은 나이 먹었다고 25살이면 은퇴했어요. 그때는 몰랐죠. 선배들 기술이 차츰 전수되면서 나이 먹을수록 기술이 올라오더라고요.”
◇ 펜싱의 미래를 위해 나선다
김영호는 이번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대표 팀으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오랜 시간 대표 팀과 함께 하며 열정을 다해 기술을 전수했고, 현 지도자들의 실력도 월등히 좋아졌다는 판단이다. 대신 현장에서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요즘 그는 펜싱의 보급화와 저변확대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영재교육 컨설팅과 펜싱을 접목한 로러스 펜싱클럽은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주 무대다. 아이비리그(IVY league: 미국 동부 8개 명문 사립대학교)를 꿈꾸는 젊은 영재들이 이곳에서 펜싱을 통해 꿈을 키우고 있다.
“하버드, MIT, 스탠포드, 브라운 등 아이비리그에서는 펜싱이 가장 인정받는 스포츠예요. 저희 클럽에 국제학교 학생들이 많이 와요. 대부분 아이비리그를 꿈꾸는 학생들이죠. 공부만 잘하는 것 보다는 스포츠를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돼요. 아이비리그에서도 리더십이 강하다는 생각으로 선호하는 편이죠. 그 중에서도 펜싱이 특히 점수가 높고 인기가 좋아요.”
김영호는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훗날 사회 저명인사로 성장해 펜싱에 대한 관심과 성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펜싱의 대중화도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2003년부터 매년 5-6명씩 아이비리그 입학을 성사시키면서 클럽을 찾는 수요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서울 한남동과 신사동, 부산 등 3곳에서 운영되고 있는 로러스 펜싱클럽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취미반도 병행하며 펜싱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펜싱을 찾는 인프라가 많은 편이에요.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많이 찾아와요. 전신 운동이라 체력에도 도움이 되죠. 중요한 건 두뇌 싸움이라는 거예요.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판단해야 하니까요. 그만큼 집중력에 도움이 되죠.”
김영호는 다음 달 실업 팀 창단을 통해 후배 양성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올림픽 금메달로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고 지도자를 거치며 경제적인 기반도 잡았지만 펜싱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돈이 중요한 목적은 아니에요. 펜싱이 더 발전하고 어떻게 보급시킬 수 있는지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만큼 제가 펜싱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잖아요. 지금도 저는 펜싱이 재밌고 좋아요.”
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 sport@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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