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즈와 왓슨의 첫 번째 만남을 그린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는 타인을 만날 때 손톱, 코트 소매, 구두, 바지 무릎, 엄지와 검지에 박힌 못, 표정, 셔츠 소매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역사와 직업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언뜻 스치는 표정이나 근육의 떨림, 순간적인 눈빛만 봐도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생각을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창조된 이 명탐정에게 21세기의 우리들이 여전히 열광하는 데는 이렇듯 누구든 볼 수 있지만 누구나 알 수는 없는 정보들을 관찰, 분석하는 비범한 능력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어떤 인물들을 ‘홈즈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어떤 추리를 할 수 있을까. 다음은 전 세계 수많은 셜로키언들이 한 번쯤 시도해보았을 인물 관찰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진은 특정 인물, 사건, 단체와 상관없다.
채링 크로스의 콕스 은행 금고 어딘가에는 오래 가지고 다녀서 닳고 찌그러진 양철 문서함이 있다. 뚜껑에는 내 이름이 씌어져 있다. <노섬벌랜드 보병 연대, 의학 박사, 존 H. 왓슨>그 속에 들어 있는 서류 대부분은 셜록 홈즈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조사하거나 해결했던 사건의 기록인데, 그 중 일부는 영국 뿐 아니라 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소개할 사건들 또한 한 국가에 정치적인 파란을 몰고 올 만한 것으로, 아무리 신중을 기한다고 해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직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므로 실제의 사건과 결부될 수도 있는 제반 사항을 밝히지 않고 사건의 방향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일부의 내용을 각색한 것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그래서, 자네는 소개팅 상대에게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할까 계속 고민 중이로군” 1월치고는 따뜻한 어느 겨울날 오후였다. 안달루시아 은행 횡령 사건을 막 해결한 홈즈와 점심식사 후 산책을 다녀와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홈즈의 기묘한 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내 마음을 읽는 데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나?” 내가 소개팅을 한 것은 이틀 전 일이었고 당시 사건 해결로 한창 바빴던 홈즈는 그 사실을 알기는커녕 외출에서 돌아온 나에게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이라는 미묘한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물론 질문을 마치자마자 나는 홈즈의 ‘잘난 척’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척 후회했지만 말이다. “사실 추론을 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네. 중간에 빠진 고리들은 다음과 같은 아주 단순한 사실들이지. 첫째, 자네가 외출을 하는 건 두 가지 이유일세. 당구, 아니면 포커. 둘째, 포커를 치는 클럽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이지. 그런데 화요일에는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어. 셋째, 자네는 당구를 칠 때 큐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왼손 엄지와 검지에 분필 가루를 묻히는데 그 날은 손이 깨끗했네. 넷째, 자네는 두 달에 한 번 이발을 하는데 그 전날 월요일에는 아직 5주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발을 했지. 다섯째, 하얀 재스민이야.”
나의 미심쩍은 표정을 힐끗 본 홈즈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는 75종의 향수가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면 반드시 그 냄새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 나만 하더라도 냄새를 재빨리 알아채는 능력 덕분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이 몇 번이나 되지. 향수 냄새는 여성의 존재를 암시했고, 하얀 재스민은 젊은 여성들이 즐겨 쓰는 향수야. 그러니 자네가 친척 아주머니를 방문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여성을 만나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지. 그리고 어제부터 자네는 평소와 달리 식사 시간 전후로 휴대폰을 붙들고 한참을 썼다 지웠다 하고 있는데 물론 그 내용은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바람이 찬데 감기 조심하세요’ 등이겠지. 그러나 그런 개성도 없고 재미도 없는 메시지 가지고는 어떤 여성도 자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네. 차라리 춤추는 사람 인형을 그려 보내든가 불빛 신호를 보내는 쪽이...” 순간 허드슨 부인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홈즈 씨, 어떤 숙녀가 찾아오셨어요”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알았으니까 좀 닥치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손님은 검은 머리를 한 중년의 동양 여성이었다. 깃이 있는 검은 재킷에 커다란 브로치를 달고 있었는데 젊어서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앉으시지요.” 홈즈가 말했다. “이쪽은 제 친구이자 동료인 왓슨입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아실 것 없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홈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나는 자리를 뜰까 고민했지만 홈즈는 내 팔을 잡고 도로 의자에 앉혔다. “우선 제가 오늘 하는 얘기에 대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해 주셔야겠어요. 5년 뒤에는 이 일이 알려져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만큼 중차대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맹세합니다.” “저도.” 야릇한 손님은 그제야 미소 지으며 말을 계속했지만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읽을 수가 없었다. “제 수첩을 잃어버렸어요.” 그동안 홈즈를 도와 의뢰인들에게 무수히 많은 편지, 보석, 조약문, 기밀문서를 찾아준 적 있지만 나는 그토록 절박하게 들리는 분실물 신고는 처음이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수백억 원의 가치가 있는 지혜,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정보들이에요. 4월에는 지방 선거가 있는데 공천에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거든요. 총선 후에는 바로 대통령 후보 경선, 그리고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누군가 그걸 훔쳐서 내용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홈즈가 물었다. “어떻게 생긴 수첩입니까?” 손님은 핸드백에서 별다른 특징 없는 길쭉한 스프링 노트를 꺼냈다. “저는 항상 이 수첩을 쓰고 있어요. 값은 싸지만 부모님께서 제게 물려주신 건 검소한 습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뿐이었기에...” “안을 봐도 되겠습니까?” 말을 자른 홈즈에게 손님은 갑자기 딱딱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구요.” 그러자 홈즈도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모국의 경찰에게 의뢰하지 않고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정치를 하다 보니 저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수첩 공주’라는 별명도 있을 정도인데, 개인적으로 패러디도 많이 당하고 그래서 면역이 잘 되어 있지만 제가 수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이때다 싶어 저를 물어뜯을 테고, 선거의 여왕인 제가 타격을 입는다면 저희 아버지께서 세우신 나라의 토대가 흔들리겠죠.”
의뢰인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여성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나이 홈즈는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 수첩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 언제였습니까?” “지난 일요일요.” “날씨가 추웠나요?” “아주 추웠죠.” “실례지만 부인께서는 코트를 몇 벌이나 갖고 계십니까?” “...세 벌요.”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속아만 보셨어요?” 그녀는 발끈한 듯 홈즈를 바라보았지만 홈즈는 개의치 않았다. “수첩을 찾고 싶으시다면 저에게는 진실만을 말씀해 주시죠.” “...열 한 벌요.” “그 중 가장 따뜻한 코트는 무엇입니까?” “갈색 세이블이에요.” “오늘 들고 오신 수수한 검은 백을 그 날도 드셨나요?” “아, 그 날은...” 말을 잇던 손님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더니 환희의 탄성을 지르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물론 도중에 돌아와 흰 봉투에 담긴 사례금을 건네고 다시 내려가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왓슨, 그녀를 보고 무엇을 알아냈나?” 이 사건을 ‘얼룩 끈’이나 ‘금테 코안경’에 이어 ‘가장 괴이한 사건 리스트’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홈즈가 물었다. “글세, 귀한 집 딸로 마음이 고운 여성인 것 같더군.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젊은 시절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꽤 있었을 것 같아. 어떤 가슴 아픈 첫사랑이 있었기에 아직 독신인 거겠지.” “시는 그만 읊조리게.” 홈즈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는 마흔아홉, 어쩌면 오십인지도 몰라. 나이에 비해서 건강 상태는 아주 좋은 편이야. 정기적으로 기 체조나 뭐 그런 걸 하고 있겠지. 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고서도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아 했어. 그녀가 뛰어 내려가던 속력을 보게. 원래는 공주 혹은 높은 공직자의 딸이었겠지. 보통은 ‘아버지께서 세우신 나라’라는 표현을 쓰지 않거든. 부모를 일찍 잃고 마음고생을 했을 거야. 검소한 습관과 애국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단호하고 고집 센 성격에,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단련이 되어 있어. 코트의 숫자를 숨기려 한 건 근검절약하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였겠지. 여자들이란.” “핸드백 얘기는 뭔가?” “왓슨, 그래서 자네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셜록 홈즈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분통이 터졌지만 나는 꾹 눌러 참고 수수께끼의 해답을 듣기로 했다. “여자들은 우리처럼 가방 하나를 매일 들고 다니지 않는다네. 검은 겉옷엔 검은 백을, 갈색 겉옷엔 그에 맞는 백을 들지. 그로 인해 사라진 립스틱, 반지, 지갑, 편지가 셀 수 없을 정도야. 메리 엘리어트 사건과 페어웰 저택의 살인의 실마리도 거기서 나왔지. 즉 그녀의 수첩 분실은 단순한 건망증이었는데, 자신이 수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믿고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네.” 언제나처럼 듣고 보면 허탈한 홈즈의 추리에 기운이 빠져 있는 찰나, 홈즈가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가발을 쓰고 올 것까진 없는데 말이야.” “뭐라고?” “자네는 그녀의 머리 모양을 제대로 보지 않았군. 아니 눈이 있어 보았다 해도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그 헤어스타일은 10년, 아니 20년도 더 된 거야. 요즘 거리에서 그런 머리 모양을 한 여자를 본 적이 있나?” “10년 전부터 계속 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잖나.” “왓슨, 자네는 정말 여자를 모르는군... 여자란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가서 미용사에게 앞머리를 내릴까 넘길까, 염색을 할까 파마를 할까, 어깨에 살짝 닿는 길이가 좋을까 어깨에서 조금 위가 좋을까 따위를 반나절씩 상담하는 생물이야. 코트와 핸드백의 색상에 신경 쓰는 여자가 10년이나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다닐 리 없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홈즈를 향해 무언가 대꾸라도 하려는 찰나, 시끄러운 소리로 전화벨이 울렸다. 탁자 가까이에 있던 홈즈가 전화를 받았다. 다음은 홈즈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한 통화 내용이다.
네, 베이커 거립니다.
- 어, 나 도지삽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 어, 도지삽니다.
...
- 여보세요.
예.
- 경기도지삽니다.
예, 무슨 일 때문에 전화하셨습니까.
- 거, 홈즈 좀 바꿔 봐요.
무슨 일입니까.
- 이름이 누구요?
상대에게 묻기 전에 용건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예의입니다.
- 어, 내가 도지산데 거기 이름이 누구요, 지금 전화 받는 사람.
...
- 여보세요? 이름이 누구냐고.
......
- 이름이 누구냐는데 왜 말을 안 해.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하셨는지 먼저 말씀을 하시지요.
- 아니 내가 지금 도지사라는데, 지금 그게 안 들려요?
내용부터 말하시죠. 지금 의뢰를 하러 전화하신 것 같은데.
- 그래, 홈즈한테 했어요. 어.
그러면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하셨는지 얘기를 하십시오.
- 아니 도지사가 이게 누구냐고 이름을 묻는데 그거 답을 안 해?
의문의 전화가 끊긴지 2분 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홈즈의 눈짓에 따라 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내가 경기도지삽니다.
예.
- 아까 전화 받던 사람 관등성명 좀 이야기해 봐요. 지금 받는 이 사람 맞아요?
아닙니다. 제가 받은 게 아닌데요?
- 지금 누구요 그럼.
아, 저는 존 왓슨입니다.
- 왓슨...?
예.
- 왓슨 씨, 군대는 갔다 왔나?
예, 아프가니스탄 전에 참전했었습니다.
- 그래... 그럼 방금 전에 받은 사람은 누구요?
아, 셜록 홈즈 사무소에 전화하셨잖아요.
- 그래, 그러니까 방금 받은 사람 이름 누구?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 도지삽니다.
예, 예.
- 아 그래요? 알겠어요. 끊어.
그리고 또다시 끊긴 전화는 영영 걸려오지 않았다. 홈즈는 이 의문의 의뢰인에 대해 “60대 남성. 고위 공직자. 마른 체격. 안경 착용. 젊어서 중이염을 앓아 청력도 좋지 않음. 병역 면제. 최고 학부 졸업. 신경질적이고 권위적이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모름” 등의 메모를 남겼고, <관등성명 수수께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나와 홈즈가 해결했던 수많은 미스터리 가운데서도 그 동기와 목적을 알 수 없는 가장 괴이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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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최지은 five@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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