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B, 3년만기 대출 통해 유로존 GDP 5% 4890억유로 대출 나서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유럽중앙은행(ECB)이 새로 도입한 3년 만기 대출 프로그램을 통해 사실상 대규모 양적완화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돈이 돌지 않는 현상인 유동성 함정에 걸려들 것이라는 의구심이 여전히 남았다.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ECB는 3년 만기 대출 프로그램을 통해 500개 이상 유럽 은행들에 4890억유로를 대출해주기로 했다. 이는 ECB가 단일 창구를 통해 대출해준 규모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4890억유로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내총생산(GDP)의 5%에 해당한다. 또 이달 초 유럽은행감독청(EBA)이 유럽 은행들이 내년 상반기까지 조달해야 한다고 한 자금 규모 1147억유로를 크게 웃돌 뿐 아니라 내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 전부를 상환하기에도 충분한 규모라고 FT는 설명했다.
4890억유로 중 신규 대출은 1900억유로이며 나머지는 은행들이 차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짧은 만기 대출을 이번에 3년 만기로 갈아탄 것이다.
ECB는 3년 만기 대출 프로그램의 입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 그리스,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은행의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은행들이 1160억유로의 대출을 신청했다고 전했다.
당초 시장에서는 은행이 3년 만기 대출을 받으면 그만큼 해당 은행이 위험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낙인이 될 것으로 염려했지만 한 스페인 은행 관계자는 "모두가 대출을 이용한다면 오명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스페인 은행 이사는 국채를 사기 위해 ECB 대출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프랑스 은행들에 ECB 대출을 이용하도록 독려했으며 이에 프랑스 최대 은행 BNP파리바도 이번에 대출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ECB는 3년 만기 대출을 통해 시중 은행이 '캐리 트레이드'를 통해 유로존 국채 매입에도 나서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제 시장 관계자들은 은행들이 ECB로부터 대출받은 자금을 이용해 유로존 국채를 매입할 것이냐에 관심을 두고 있다.
ECB는 3년 만기 대출을 통해 시중 은행의 신용 경색 해소는 물론 내심 캐리 트레이드를 통해 유로존 국채 매입에도 나서주기를 원하고 있다.
은행들이 이번에 1% 수준의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아 금리가 5~6%대 수준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를 매입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6월 당시 ECB가 1년 만기 대출 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했을 때 은행들은 대출받은 4420억유로 중 절반가량을 그리스, 스페인 등 고금리 국채를 매입하는 데 썼다.
그러나 FT는 렉스 칼럼에서 지난 3년간을 살펴봤을 때 은행들이 혼란이 예상되는 내년을 대비해 이번에 대출받는 자금을 비축해둘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유동성은 대규모로 공급되지만 시중에 자금이 돌지 않아 기대한 만큼 유로존 국채 매입과 신용 경색 해소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다.
한 이탈리아 은행 관계자는 EBA가 지난 10월 규정을 바꿔 은행이 보유한 국채를 시장가(mark to market)로 평가하도록 했기 때문에 은행이 ECB 대출금으로 국채를 사면 오히려 은행의 재무제표가 나빠진다고 주장했다.
FT는 그러나 신용 경색을 해결해 주지는 못 하겠지만 은행들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자산을 헐값에 매각해야만 하는 부담을 줄여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여유 자금이 생기면 은행들이 전통적으로 자금을 비축해두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국채에 자금을 넣어둘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전날 뜨겁게 달아올랐던 유럽 주식시장은 신중한 태도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주요 증시는 초반 상승세를 이어가는듯 했지만 장중 하락반전해 약세마감됐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국채 가격도 하락했다.
소시에떼 제네랄의 세바스티앙 갈리 선임 외환 투자전략가는 "은행에 대한 금융적 지원 측면에서 '포도당(sugar-rush)'이 공급됐지만 유럽이 직면한 뿌리깊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고 지적했다.
박병희 기자 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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