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은 직업이 아닌 인종의 분류일지도 모르겠다. 신의 솜씨로 빚어야 가능한 실루엣을 타고난 모델들은 누구보다 눈에 띄는 외모로 자신보다 옷을 더 돋보이게 하는 아이러니의 운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장윤주는 단지 키가 크다거나, 말랐다는 특징으로는 형용이 되지 않는 특별한 윤곽과 비율을 부여받은 행운아다.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예능인의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후로 좀 코믹한 광고가 들어 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광고를 찍으러 가면 나는 모델이에요. 항상 걷는 장면을 찍는데, 정말 힘들어요. 다리가 후들후들 할 때까지 걷고, 또 걷고.”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는 남모를 고충을 털어 놓았지만, 사실 파급력이 엄청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도 고유의 느낌을 간직할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 한 일은 아니다. 그야말로 장윤주는 선천적인 모델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어진 것만큼이나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것에 주목한다. 스물아홉 살의 고개에서는 틈틈이 공부했던 음악 작업들을 앨범으로 묶어 냈고, 올해는 매일 아침 라디오 DJ로 활동하며 영역을 넓혔다. 모델로서 자신의 커리어에 만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전! 슈퍼모델 KOREA 2>를 통해서는 눈 밝은 선배로서 신인들을 발굴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행사의 상징이자 공연을 하는 뮤지션으로 참여했던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은 장윤주의 두 가지 얼굴을 모두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음악으로 가득 찬 계절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이 가을의 우울함을 만끽하는데 도움이 될 노래들을 골랐다. 자신의 플레이어에 만들어 둔 ‘가을’이라는 폴더를 열어 그녀가 직접 들려준 노래들은 하나같이 가을의 영혼을 타고 난 뮤지션들이 만든 음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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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ric Clapton의 < Clapton >
‘요즘 가장 꽂혀 있는 노래들’이라고 말문을 열었지만, 장윤주의 가을 폴더를 채우고 있는 대다수의 노래들은 갓 만들어진 노래들이 아니었다. 이브 몽땅의 버전으로 유명한 샹송 ‘고엽’을 리메이크한 에릭 클랩튼의 ‘Autumn Leaves’ 역시 세월의 무게 안에서 고전의 향기를 품고 있는 곡이다. “에릭 클랩튼은 얼굴만 봐도 너무 멋있어요. 원래 그의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 노래는 너무 끈적끈적하지 않으면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블루스의 느낌이 마음에 들어요.”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손꼽히는 에릭 클랩튼은 이 곡에서 피아노가 음악을 리드하게 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러나 노래가 끝난 뒤 현란한 기타 독주를 얹어 재능의 양면을 모두 선보인다.
2. Bette Midler의 < Divine Miss M >
장윤주가 두 번째로 추천하는 노래 ‘Am I Blue’ 역시 냇 킹 콜, 빌리 할리데이를 비롯한 수많은 싱어들이 불렀던 스탠다드 재즈 넘버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배트 미들러의 목소리로 녹음된 버전이다. “끈적끈적 한 매력이 있는 곡이죠. 가사부터가 완전 우울하기도 해요. 아이 엠 어 우먼, 론리 우먼이라잖아요.” 배우로서도 큰 명성을 쌓은 배트 미들러의 곡 해석은 장윤주에게 단순한 감상 이상의 영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예전에 방송에서 그랜드 피아노 위에 올라가서 이런 느낌을 연출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이적 씨가 끈적한 재즈 느낌의 음악을 해 보라고 권유하시더라구요. 저도 이제 좀 더 여인의 느낌이 나는 음악을 해 볼까 해요.”
3. Pudding의 < If I Could Meet Again >
“좋아하는 건 물릴 때까지 반복해서 보고 듣는 편인데, 이 노래는 어제만 해도 몇 십번은 들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장윤주는 푸딩의 앨범에 빠져 있다고 했다. 특히 산울림의 ‘안녕’에서 출발해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재즈 연주로 이어지는 ‘안녕’은 장윤주가 “어쩜 이렇게 편곡을 잘했을까 놀라요”라며 감탄하는 곡이다. 피아니스트로, 영화 음악 감독으로 활동 중인 푸디토리움의 솔로 앨범 역시 장윤주가 아끼는 음반. “특유의 감성이 잘 와 닿는 것 같아요. 솔로로 작업하신 앨범에서 ‘Sans Rancune’이라는 곡의 프렌치 버전도 정말 추천하고 싶어요.”
4. 손성제의 <비의 비가 (悲歌) (Elegy Of Rain)>
보컬이 돋보일 때는 연주가 잔잔하고, 때로는 연주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좋아하는 장윤주의 취향 안에서 손성제의 앨범은 많은 요소들이 한꺼번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원래 손성제 씨가 유명한 색소폰 연주가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다가 이번 앨범은 박창학 씨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고 해서 듣기 전부터 기대가 굉장했어요. 좋은 곡들이 많고, 참여한 보컬리스트들도 다 좋은데, 저는 하림 씨가 노래한 ‘어느 날’이 특히 좋아요. 죽은 남자가 남겨진 연인에게 보내는 이야기인데, 가사가 정말 슬프거든요.”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손성제의 새 앨범 <비의 비가>는 대중적인 송라이터로서 뮤지션의 재발견을 일구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 Abdullah Ibrahim의 < Cape Town Revisited >
좋은 음악은 결국 마음으로 전달되며, 상상력으로 소통한다. 그래서 장윤주는 애절한 가사도 없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공유할 수 있는 정서도 부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피아니스트 압둘라 이브라힘의 곡을 소개하면서 가장 구체적인 감상을 들려주었다. “음악이 차분해서 슬픈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제목이 ‘Wedding’이예요. 그래서 저도 이 곡을 언젠가 제 결혼식에서 꼭 듣고 싶어요. 교회에서 경건하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앨범의 배경인 케이프타운처럼 먼 곳의 해변이나 작은 잔디 정원에서 조용하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 곡이 흘러나오는 순간에 사랑의 서약을 하면 정말 좋겠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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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이야기하는 장윤주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탄식을 내쉬기도 했다. 이 계절에 완벽히 어울린다는 재즈 피아니스트 칼라 브레이의 ‘Lawns’부터 새삼 가사를 곱씹어보고 있다는 이적의 ‘사랑은 어디로’까지, 다양하면서도 하나의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그녀의 취향은 장윤주의 지난 십 수 년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늘 화려한 패션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옷은 언제나 가장 단순하고 단정한 것을 입는 여자. “이제는 예전처럼 일주일에 CD를 10장씩 사고 그러질 못해요”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벌써 용량 가득 음원을 구입한 휴대폰을 갖고 있는 여자. 늘 메모하는 것을 좋아해 만년필로 종이 수첩에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이 여자는 제자리를 지킴으로서 자유로워지는 삶의 비밀을 알고 있다. “많은 일을 하지만 결국 장윤주는 모델로 기억될 것 같아요. 그러고 싶어요”라는 그녀의 말은 그래서 그녀의 바람인 동시에 우리가 보고 싶은 결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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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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