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고향인 시르테에서 69세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 그는 정말 '미친 개'였을까 아니면 일각의 주장대로 '반제국주의의 선봉장', '사회주의 인민혁명의 수호자'였을까.
카다피는 1942년 리비아 중부 해안도시 시르테 인근 유목 베두인족의 일파인 카다파 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배움과 출세에 대한 의욕이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10살 때인 1952년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이에 깊이 감명 받아 이후 나세르의 아랍 사회주의·민족주의, 민중해방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게 됐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벵가지 소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료 생도들과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이는 왕정 타도를 목표로 내건 조직이었다. 그는 1965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동안 영국으로 파견 근무를 나갔다 귀국해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1969년 9월 1일 육군 대위 카다피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기습 쿠데타를 감행했다.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터키로 망명해 리비아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카다피는 비상혁명위원장으로 총리·국방장관·국가평의회의장(의회 의장)·국가원수를 모두 겸했다. 그러나 2년만에 총리직과 국방장관직을 내놓고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남았다.
그는 1974년 정치이론 연구에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햇빛을 보게 된 것이 그의 정치이론을 집대성한 '그린북'(The Green Book)이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 금주, 독자적인 직접민주제가 '그린북'의 요체다
이후 카다피는 철저한 반미주의로 미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 외국 석유회사, 이탈리아인·프랑스인 등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도로·항만·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도 국유화 혹은 국영화했다.
악화하기 시작한 대미 관계는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발사건으로 미 병사가 사망하자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1911~2004) 미 대통령은 리비아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해 트리폴리와 벵가지 공습에 나섰다.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 개'라고 처음 지칭한 인물도 레이건 전 대통령이다.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미 팬암 여객기가 폭파돼 탑승자 259명 전원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1년 미국·영국은 리비아의 정보요원이 팬암기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유엔은 리비아 제재에 나섰다.
모두가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 개'로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경제 발전과 군사력 증강을 위해 애썼다. 외교적 수완도 뛰어나 이집트·시리아와 함께 아랍공화국연방 창설을 시도했다. 리비아 대수로 건설은 그의 큰 업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더욱이 카다피는 사막에서 유전을 개발하고 리비아를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 수준의 경제 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유엔 연설에서 미국 등 서방에 날카로운 일침을 가하고 유럽 국가들이 식민역사를 지닌 아프리카 국가들에 배상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진수 기자 com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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