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고경석 기자]류승범은 믿지 않았다. 영화 '부당거래' '수상한 고객들'의 연기에 대한 칭찬에 그는 "고맙지만 부끄럽다"면서 간신히 입 꼬리를 올렸다. 불친절해 보이는 이 같은 겸손은 류승범 본인의 주장과 주의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솔직한 감정 표현"이다.
영화 '수상한 고객들' 언론시사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보여준 경직된 불친절함도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 시사 후 유난히 굳은 표정으로 "멍하다"는 말과 함께 취재진의 질문에 즉답을 내놓지 못했던 류승범은 이후 언론의 질타를 받아야 했다. 그는 "솔직 담백하면서도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며 "다만 내 태도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면 겸허하게 비판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류승범은 혼란에 싸여 있는 듯했다. '수상한 고객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도 정리가 안 됐다고 말했다. 내용만 대신 정리하면 '수상한 고객들'은 연봉 10억원 계약을 눈앞에 둔 보험 컨설턴트가 자살 시도 경력이 있는 고객들의 삶에 희망을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다. 류승범의 연기도 간단히 정리하자면, 꽤 훌륭하다. 능청스런 표정 연기, 코믹한 말투와 대사,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 표현이 류승범의 진가를 알려준다. 14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류승범을 만났다.
- '수상한 고객들' 연기에 대해 호평이 많다.
▲ 부끄럽다. 겸손해야겠다는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다. 요즘 나 자신을 자주 만난다. 나 자신을 지켜보고 공부하는 중인데 칭찬을 듣기에는 부끄러운 면이 많다. 배우가 다 배우는 아닌 것 같다. 누가 불러주니까 배우라고 불리는 것이다. 나 자신이 더욱 더 성장해야 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 촬영하는 동안 지난 겨울 추위로 인해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 유난히 추웠던 것 같다. 추위 빼면 할 얘기가 없을 정도다. 혹독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비를 맞는 장면이 있는데 물에 젖은 채로 가만히 있으면 얼어버린다. 그걸 다시 녹여야 촬영할 수 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찍으니 한기가 더 크게 느껴진다. 다행히 감기는 안 걸렸다. 철저히 긴장을 하고 가면 아플 시간이 없다.
- 영화 내용상 밤 촬영이 많아 더 힘들었겠다.
▲ 밤을 잘 못 새는 편이라 새벽 3시가 넘으면 큰 고비가 찾아온다. 스태프들이 나를 인간시계라 부를 정도다. 잠과 싸우는 게 쉽지 않다. 조감독님이 신경을 많이 써줘서 밤을 꼬박 새고 찍지는 않았다. 잠을 이기는 방법은 없다. 그저 악과 깡으로 버틸 수밖에.
- 시나리오를 읽은 첫 느낌이 어땠나.
▲ 원래 봄부터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비 맞는 장면을 걱정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 느낌은 푸르렀다고 할까. 실제로 촬영된 영화는 회색빛이 감돈다.
- 어떤 점에 끌렸나.
▲ 소통이었다. 최근 자살이란 화두가 우리에게 확 다가오지 않았나. 항상 자살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부분의 소통에 관심이 갔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안 해서 그렇지 어떤 순간에는 비관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나.
- 주인공이 여러 인물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 주 내용이다 보니 출연 비중이 80%가 넘는다. 중압감은 없었나?
▲ 초반엔 내 출연 분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감독님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주인공이 너무 많이 등장하면 그 인물의 몫이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배우로서도 더욱 섬세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내가 연기한 병우가 관조적 시점을 가지고 있으면 했다. 병우가 너무 많이 나오면 캐릭터가 지닌 애초의 의미와 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영화에서 류승범이라는 사람이, 배병우라는 캐릭터가 개인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물 흐르듯 강물에 휩쓸려 가듯 자연스런 느낌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배병우가 많은 신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것 때문에 부담이 안 됐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축과 주인공이 여러 인물을 만나야 완성되는 축이 공존해야 하는데 그 균형이 힘들었다. 균형을 잡고 정확한 계산 하에 연기하면 좋을 텐데 그게 완벽하게 되지는 않잖은가.
- '수상한 고객들'에서 한 연기가 불만스러운가.
▲ 어떻게 완성이라거나 만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어떤 작품이건 100% 만족은 있을 수 없다. '불만족'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강한 표현이다. 내 생각에 아쉬운 측면도 있고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내 영화를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점점 객관적일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되물어 보게 된다. '내가 맞다'라는 생각이 점점 파괴된다. 자기 질문의 시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 스스로를 괴롭히는 편인 것 같다.
▲ 그런 것 같다. 자기 얼굴엔 자기밖에 침 못 뱉는다. 고흐는 자기 귀를 잘랐다. 자기성찰의 시간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성찰이 없으면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어쩌다 보니 '배우 류승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내가 내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해야 한다. 내 부족한 부분 중 하나인데 자학을 즐겨 한다. 자꾸 자학으로 가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그렇다. 자기성찰은 좋은데 자해는 좋지 않다. 가파르지 않은 경사를 타고 차분하게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잔 파도를 겪으며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내 안에 싸움이 치열하다. 좀 더 성숙해지기를 나도 바란다.
- 남들 앞에서 속마음을 잘 감추는 성격인 것처럼 보였다.
▲ 나도 잘한다고 생각했다. 원만한 곡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좀 더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진짜 어른'이 되기를 항상 꿈꾼다.
- 성격이 많이 예민한가.
▲ 그런 것 같다. 나 자신이 힘들 때 나 혼자 조용히 처박혀 있으면 괜찮은데 그렇게 안 되니 주위사람들이 싫어할 때도 있다. 가끔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이기적으로 굴 때가 있다. 자기애가 강하니까 주위사람을 못 돌아볼 때가 있다
- 여자친구(배우 공효진)를 힘들게 할 때도 있나.
▲ 그렇다. 정말 뭣 같은 놈을 사랑으로 감싸준다는 게 늘 고맙다.
- 좋은 배우란 건 어떤 존재인가.
▲ 잘 모르겠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배우가 돼야겠다고 생각한다. 삶을 굉장히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주위 분들에게 구린 놈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구린 짓도 그만 하고 치열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모든 문제는 내게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남 탓도 많이 했다. 어떤 영화는 작품에 임하는 태도가 구린 지점이 있기도 했다. 내 자신에게 물어봤을 때 '구리지 않다'고 답할 정도로 살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다. 겁쟁이여서.
- 시사회 때 태도가 논란이 됐다.
▲ 요즘엔 뭐든지 잘 모르겠다. 명쾌한 게 별로 없다. 저는 그 자리에서 굉장히 솔직 담백하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내 태도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면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이유는?
▲ 그저 멍하더라. 영화가 좋고 나쁘고, 생각한 영화가 맞고 아니고를 떠나서 멍했다.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은데 다른 생각들이 교차한다. 아직도 명쾌하게 고민이 뭔지 모르겠다. 단순 명쾌하게 정리되면 좋을 텐데. 일부러 후벼 파려했던 건 아니다. 내가 대답할 만큼의 준비도 안 됐고 속으로도 '어? 뭐지? 뭘까?' 하고 질문을 갖게 되니까 답을 못 하고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다. 그날뿐만 아니라 계속 멍한 상태의 연속인 것 같다. 요즘 계속 '난 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잡념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들이 덩어리로 차 있다. 그래서 내 말투나 제스처가 어색하다. 나 자신을 보면 어정쩡하고 어색하다.
- 조금 더 고민이 적고 명쾌했던 데뷔 초가 그립지 않나.
▲ 투박하고 멋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나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진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도 고민을 좋아하는 성격이긴 했다. 21살 때 원형탈모가 왔으니까. 고민은 나뿐만 아니라 다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특성에 따라 푸는 방법이 다르겠지. 나도 방법을 잘 찾아서 혼란이 없도록 중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 '수상한 고객들'에는 성동일 박철민 등 선배 배우들과 이야기하며 조언을 들을 일도 많았을 것 같다.
▲ 성동일 선배에게 많이 들었다. 직업에 대한 생각을 많이 들으면서 이 분은 이렇게 접근하면서 사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박철민 선배와도 이야기를 나누며 '이 선배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나다운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연으로서 여러 선후배 조연 배우들과 연기해보니 어떻던가.
▲ 사람들이 말하는 주인공이 있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만드는 주인공은 따로 없다. 성동일 박철민 선배가 진정한 주인공 역할을 해줄 때 그분들이 괜히 선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내가 지쳐 보이면 나를 재미있게 해주기도 하고 먹을 것도 챙겨줬다. 여러모로 고마웠다. 그런 분위기에 있으니 후배들에게도 신경을 쓰게 된다. 영화 특성상 이야기 좀 할 만하면 술자리가 끝나고 한 배우와도 친해질 만하면 다른 배우와 찍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다.
- 미래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다고 종종 말했다. 보험을 들어놓은 것도 없다던데.
▲ 아, 자동차 보험은 들었다. 누군가 권유를 해준 적이 있다면 보험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봤을 텐데 그런 적이 없었다.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은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다.
- 결혼도 그래서 하지 않는 것인가.
▲ 결혼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아직 안 해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결혼에 묶인다는 생각보다는 준비가 안 됐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부자연스럽지 않고 삐걱거림이 없어야 하니까.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 여자친구도 생각이 같은가.
▲ 비슷하다. 일이나 취향은 다를 수도 있지만 그 부분에 있어선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나.
▲ 아직 없다. 지난달에 프랑스 파리에 다녀왔는데 우연찮게 좋은 친구를 만났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하는 프랑스인인데 다음달에 자기 앨범 녹음이 있어서 구경시켜준다고 했다. 음악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건 아니다.
- 음악을 공부할 생각은 없나?
▲ 이제는 내가 음악을 진짜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모든 게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음악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답을 못 하겠다. 음악을 공부해보고 싶은 건 분명하다.
스포츠투데이 고경석 기자 kave@
스포츠투데이 사진 이기범 기자 metro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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