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경제 뉴스보다 재벌을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드라마다. MBC <욕망의 불꽃>과 <로열패밀리>, SBS <마이더스>는 모두 재벌가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돈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중에서도 <로열패밀리>의 JK그룹 총수 공순호(김영애) 회장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재벌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어떤 식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법조계에는 ‘장학생’을 심고, 공직자와는 서로의 약점을 쥔 거래를 하며 여론은 돈으로 움직이는 그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천민’들과 다른 ‘JK 사람’의 권위다. 왕후장상의 씨는 없다고 하는 21세기, 그러나 점점 더 자신들만의 성을 높게 쌓아올리고 있는 재벌가를 대표하는 공순호 여사와 <10 아시아>가 가상 인터뷰를 시도했다.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진 방은 공기마저 무거웠다. 17세기 오스트리아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통째로 공수해 왔다는 육중한 가구들이 대(大) JK의 위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간 기분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녀가 말쑥한 인상의 중년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따로 설명은 없었지만 JK의 ‘더티 잡’을 도맡아 한다는 엄 집사의 존재를 미리 알고 갔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JK 그룹의 총수이자 철의 여인, 글로벌 경영의 선두주자 공순호 회장.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와의 인터뷰는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그녀는 까칠했다. 그리고 때로 상대방을 오금저리고 얼어붙게 했다. 선대 회장이었던 부군의 사후, 병든 얼룩말에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이사들 틈에서 여자 혼자 몸으로 대기업을 이끌어오며 복종하는 사람만 키우고 반역하는 사람은 철저히 밟는 공포정치를 펼쳐 온 재계의 로베스 피에르다웠다.
또한 이번 인터뷰엔 조건이 많았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정가원에서 제공한 사진만 사용할 수 있었고 최근 호스트와의 불미스런 동영상이 유출되었다는 소문에 휩싸인 손녀 조 모 양, 메이드와 외도를 저질렀다는 루머가 증권가 찌라시에 떠도는 장남 조동진 씨에 관한 질문도 불허였다. 콘돌리자 라이스 前 미 국무장관, 대서양 그룹 김태진 회장 등 국내외 다수의 명사들과 자유롭게 한담을 나눠온 바 있는 본 기자에게는 가장 굴욕적인 조건의 인터뷰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초대면부터 반말에, 때론 깔보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으며, 중간 중간 집사에게 귀엣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인터뷰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지금도 그녀의 형형한 안광(眼光)이 떠오른다. 본 기자를 향해 “저거, 치워”라고 내뱉던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기자 따위가 감히 JK에 훈수를 두는 상황이라니”
<#10LOGO#>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회장님의 삶에도 결핍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주체하기 힘든 돈, 검찰도 쥐고 흔드는 권력, 나이보다 훌륭하신 외모...
공순호 회장 : 찬사는 고맙네만 하나마나한 소리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10LOGO#> 요즘 재계에서는 JK가 대대적인 계열사 지분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요. JK클럽을 지주사로 전 계열사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다는...
공순호 회장 : 그래서. 아둔한 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10LOGO#> JK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고용 효과, 성장동력 등을 감안한다면 경영권 세습의 편의를 위한 움직임보다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 같은 대승적 과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가셔야 하지 않는가 라는...일각의 지적에 대해...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공순호 회장 : 감히 이익공유제인지 나부랭이인지 하는 공산주의 용어로 날 가르려 들 생각은 아니겠지. 이건 JK 역사상 두 번째로 수치스런 일야. 어디 광고비 받아먹고 자판이나 두드리는 기자 따위가... 감히 JK에 훈수를 두는 상황이라니, 내 탓이야. 집안의 개를 얌전히 묶어두지 않았더니 온 동네 개들이 다 와서 짖어대는군. 엄 집사, 당장-
<#10LOGO#> 아, 저...방금 말씀드린 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요즘 여론에서 그냥 떠들어대는...
공순호 회장 : 해명하지 마. 닥치고-
일촉즉발의 상황, 공순호 회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얼어붙은 방 공기를 깨뜨린 벨소리는 ‘넬라 판타지아’였다. 전화를 받은 공 회장은 잠시 상대의 말을 경청한 뒤 “여차하면 금치산자로 만들어요. 평창 동계올림픽 실사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정선 카지노에서 미팅 잡아 도지사 후보 둘 다 보험 들어 놓으세요”라고 빠르게 지시했다. 불과 10초 사이 몇 사람의 인생을 골로 보낼 수 있는 JK의 위엄이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10LOGO#> 제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화제를 잠시 돌려볼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지금은 고인이 되신 둘째 아드님께서...
공순호 회장 : 외람된 줄 알면 하지 마.
“내가 여기 이러고 앉아있는 동안 일 분에 몇 억이 오가는지 아나”
<#10LOGO#> ...둘째 아드님이신 故 조동호 박사님께서 18년 전 JK클럽 계약직 프론트 오피서 출신의 김인숙 씨와 결혼한다고 하셨을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드님의 사망 시 위자료는 5천만 원뿐이라는 혼전 계약서까지 작성하게 하셨다던데 사실인가요?
공순호 회장 : 사실이면, 기소라도 할 건가?
<#10LOGO#> 하하. 농담도 참 잘 하십니다...회장님, 재치쟁~이!
공순호 회장 : ......
<#10LOGO#> ......죄송합니다.
공순호 회장 : 우리 JK 사람들은 천지분간 못하고 망둥이처럼 날뛰는 계집애 하나 정리 못해서 봉투 들이밀며 “돈으로 보상하마. 어마어마하게 보상하마” 하는 천박한 졸부 짓 따위 하지 않아. 자기가 JK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 알아서 떨어져나가는 거지. 대서양 그룹은 손주 며느리로 어디서 근본도 모를 탤런트를 들인다던데 우리 JK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10LOGO#> 하지만 셋째 아드님 조동민 전무님께서는 연예인들과 무척 친분이 깊으시다고...
공순호 회장 :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나쁜 건 용서해도 눈치 없는 건 용서 못해.
<#10LOGO#> 아, 하하! 네, 물론 대중문화에 조예가 깊으셔서 그런 거겠죠. 셋째 며느님께서도 방송인 출신이시고 하니 일종의 기업 메세나적 차원으로다가...
공순호 회장 : 내가 여기 이러고 앉아있는 동안 일 분에 몇 억이 오가는지 아나? 세상에 허튼 소리는 있어도 허튼 돈은 없어. 마지막 질문 하나만 하고 끝내.
<#10LOGO#> ...예. 그런데 김인숙 씨가 결혼 생활 18년 동안 정가원에서 ‘K’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다가 최근 JK클럽 지주사 사장직에 오르게 된 것은 유력한 대선 후보 부인인 진숙향 여사와의 친분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럼 1라운드 결과가 회장님의 패배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공순호 회장 : ...가.
<#10LOGO#> 네?
공순호 회장 : 나가! 십 초 내로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토막 내서 몰타 해변 상어 밥으로 던져줄 테니까.
지중해의 몰타, 그 꿈의 휴양지로 떠나는 것은 기자의 오랜 꿈이었지만 그것이 사후이길 원하지는 않았기에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엄 집사, 자네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라는 노성이 들려왔다. “원고 검토 받고, 토씨 하나라도 나가면 광고 다 빼겠다고 해. 아니, 인쇄소에서 풀리자마자 통째로 다 사 버려. 아니, 그냥 폐간시켜 버려!” 물론 아무리 대기업 총수라 해도 하나의 언론 매체를 묻어버릴 수 있을 리 없다.
라고 생각한다면 독자 여러분은 아직 순진하거나 세상의 쓴 맛을 못 본 것이다. 이튿날 <십아세아>가 폐간되며 실리지 못했던 본 기자의 ‘인터뷰 X 파일 - 공순호 여사 편’으로 인해 향후 발생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게재키로 한 <10 아시아>에 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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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최지은 five@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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