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의원 기자]
기업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로 월가를 주름잡던 조셉 플롬이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4일(현지시간) 플롬이 수 주간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심장마비로 23일 뉴욕 프레스비테리언 병원에서 숨졌다고 보도했다.
조셉 플롬은 1970~1980년 적대적 M&A의 베테랑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 시작은 미미했다. 1923년 12월 21일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플롬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족들은 집주인들이 월세를 내며 이집 저집을 옮겨다닐 정도로 가난했다.
플롬은 1923년 12월 21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퀸스지방의 타운센드 해리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시립대학교의 야간학부를 2년간 다녔다. 그는 대학교를 마치지 않고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제대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 1948년 법학 학사 학위를 땄다. 하버드 재학시 로스쿨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을 지냈다.
플롬은 이어 하버드 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48년 직원 4명인 Skadden, Arps, Slate, Meagher&Flom LLP라는 작은 로펌으로 월가에 진출했다.
당시 적대적 인수합병( M&A) 소송을 꺼리던 대형로펌들은 소형로펌들에 일을 맡기곤 했는데 플롬은 일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며 인수합병 업무에 매진했다. 이후 시대가 바뀌어 기업간 M&A이 활성화 되면서 플롬은 법조계와 재계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그의 로펌은 2000명의 변호사를 거느린 대형 회사로 성장했다.
플롬은 특히 1974년 대형 M&A를 성사시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캐나다 인터내셔널 니켈사가 배터리 제조사 ESB를 적대적으로 인수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 건은 M&A 역사에서 현재까지도 ‘이정표가 된 거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기업사냥꾼인 로널드 페럴만(Ronald Perelman)과 레블론과의 인수합병건에 관여하는 것을 비롯, 티 분 피켄스(T. Boone Pickens)와 우노칼(Unocal), 사울 스타인버그(Saul Steinberg)와 케미컬뱅크(Chemical Bank)등의 인수합병에 참여했다.
그가 성공을 거둔 비결은 고객의 입장에서 소송을 진행하면서 기업매수자부터 인수목표까지 모든 요소를 고려한 것이다.
플롬은 1988년 런던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일방으로 어느 한쪽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못 견디는 것은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못할 때”라고 말했다.
플롬은 인수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냉혈한'처럼 비치지만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꼽으며 존경을 표시한다.
모건스탠리 전 부회장이자 금융 서비스 회사인 페렐라 웨인스버그 파트너스를 세운 조셉 페렐라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멘토(mentor. 스승)로 삼기 원했는지 모른다”면서 “그러나 나야말로 그의 천재성과 관대함의 덕을 본 사람”이라고 말했다.
컨설팅회사 카사블랑카 캐피탈의 도널드 드랩킨 M&A 전문가는 “플롬은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또한 멘토였다”고 했다. 그는 “좋은 사람(mensch)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단어 옆에 조(조셉 플롬의 애칭)의 사진이 같이 실려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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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콤 글래드웰은 저서 '아웃라이어(Outliers: The Story of Success)'에서 플롬은 회사를 세우고 다각화시켜 M&A 분야를 특별한 분야로 만들었다고 평가하면서 “20년 동안 그는 그의 회사 스카덴에서 작품(M&A분야)을 완성시켰으며 이후 M&A 분야가 활성화된 시기가 왔을 때 준비가 돼 있었다”고 칭찬했다.
플롬은 세계적인 로펌 체임버스 앤 파트너스(Chambers and Partners)와 미국 법률 전문지 아메리칸 로이어(American Lawyer)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았으며 뉴욕시립대 학장상을 받았다.
이의원 기자 2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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