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촌스럽게 요즘 수표를 써"..'5만원의 경제학' 생활속으로
5만원권 발행 1년... 달라진 풍속도
"불룩 나온 주머니 NO" 날씬해진 지갑
뇌물수수, 돈세탁 등 음성거래 우려 여전
[아시아경제 이현정 기자]우즈베키스탄에 사는 알료나 가족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타슈켄트에서 최고급으로 꼽히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대가족의 저녁식사 값은 우리 돈(한화) 10만원 정도. 신용카드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은 탓에 알료나는 가방에서 돈 다발을 꺼내 계산했다. 현금 다발을 꺼내 계산하는 풍경이 이곳에서는 낯설지 않지만 지폐를 세는 기계까지 놓고 셈을 치르는 데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다.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경제규모도 커졌다는 의미다.
지난 1973년 1만원권이 발행된 이후 36년만에 등장한 최고액 화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매우 높았다.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 선정부터 고액권 발행에 대한 정치ㆍ경제적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5만원권 발행의 가장 큰 목적은 경제규모에 맞지 않은 소액권 사용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국민의 불편을 줄이는 것이다.
고액권 사용으로 많은 지폐를 소지ㆍ보관해야 하는 불편함을 줄이는 동시에 수표를 사용하면서 이서하고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등의 번거로움도 없다.
5만원권 등장은 당장 실생활에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평가다. 우선 지갑이 얇아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5만원권이 1만원권을 대체하면서 두껍게 현찰을 넣어야 할 경우가 적어진 것도 사실이다. 지갑 대신 선진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머니클립이 대중화되고 있는 것도 신권 발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인플레이션 우려감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현장은 결혼식장과 장례식장. 축의금이나 부의금의 최저기준이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회사원 김모씨는 "지난해에는 경제도 어렵고 해서 결혼식 축의금으로 친한 경우가 아니라면 3만원 정도를 넣었는데 5만원권이 나온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최하 5만원으로 높였다"고 말했다.
자금추적이 가능한 10만원권 수표를 5만원권이 대체하면서 뇌물수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뇌물의 상징인 사과박스의 경우 1만원권은 최대 2억4000만원을 넣을 수 있지만 5만원권을 넣으면 5배가 늘어난 10억원이상의 현찰이 들어간다. 정부가 금융정보분석원을 통한 자금 이상거래에 대한 조사기준을 대폭 강화한 것도 신권 발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금융계의 분석이다.
5만원권 발행으로 금융권의 현금관리에 따른 부담은 줄어드는 긍정적인 효과도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 발행으로 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제조와 취급과정에서 생기는 연간 2800억원의 비용을 절약하는 효과가 발생했다.
신권 발행에 따른 자동화기기 개선 등으로 1대당 500만~600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자기앞수표는 화폐와 달리 발행부터 지급, 정보교환, 전산처리 및 보관 등에 들어가는 비용감축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또 1만원권 수요의 40% 정도가 고액권으로 옮겨가면서 연간 약 400억원의 화폐 관리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5만원권 발행 초기 위조방지 장치인 은색선과 지폐 사이의 벌어짐 현상에 대한 논란, 5000원권과 헷갈려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지적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일단 한국은행이 5만원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이성태 전 한은총재는 지난 3월 말 퇴임식에서 4년간의 성과로 5만원권 발행을 꼽기도 했다.
그러나 5만원권 발행이 모두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5만원권 발행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지폐를 발행하는 한국조폐공사다. 고액권이 발행되면서 전체 지폐 발행량이 줄고 10만원권 수표 수요가 급감하면서 경영실적에 빨간불이 켜졌다. 해외 전자여권 수주나 금화(기념주화) 발행 등의 얘기가 나오는 것도 경영난 타개책의 일환이다.
이달로 1년째를 맞은 5만원권 발행으로 연간 10억장 수준이던 지폐발행량은 5억장 수준으로 줄었다. 1년새 지폐 못지 않은 주 수입원인 수표 발행이 30% 가량 감소했고 1만원권 발행량도 대폭 감소했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 발행 수수료 수입도 눈에 띄게 줄었다.
발행량이 줄면 매출이나 수익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2008년 50여억원의 순이익을 냈던 조폐공사는 지난해 간신히 적자를 면했다. 전용학 조폐공사 사장이 직접 나서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경영위기"라고 앓는 소리를 할 정도다.
인플레 기대심리를 자극해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사용자가 고액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효과를 가져와 경기활성화와 동시에 과시형 소비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5만원권 유통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5만원권 입출금이 가능한 ATM기를 늘리고 뇌물수수, 자금세탁 등 음성적 자금거래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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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기자 hjlee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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