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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의 수화 김환기의 고향 안좌도 여행<3>

순수한 빈자의 욕망이 바로 예술가의 욕망인 셈이다


내가 보는 그의 그림세계는 단연 그런 예술가적 가난의 산물이다. 나는 그의 색점화 속에서 어느 순간 말하기보다 침묵을, 의도하기보다 놓아두기를 지향하는 그의 자발적 가난 또는 가난의 미학과 만난다.

수천수만의 물방울 같은 색점들이 화면 가득히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 속에서 마주친 세계를 재현하겠다는 표상과 형상을 여윈 가난의 마음이 지나간 흔적들을 본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를 그친 욕망 아닌 욕망. 그럼에도 끊임없이 말하기를 그칠 수 없는, 순수한 생의 유희로서의 욕망. 분명 욕망이되 전혀 욕망 같지 않는 욕망이 바로 참된 예술가의 욕망이자 수화 김환기의 욕망임을 확인한다.
그가 남긴 작가노트 역시 이를 증거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린다. 생각한다면 친구들 그것도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뿐이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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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그리다니! 그러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예술가적 야심과 야망이 아닌 무심과 무욕의 운필(運筆)을 뜻한다. 개별적인 형상을 넘어 무한히 이어지는 생명의 그물코, 생성의 인드라망을 포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계산과 이해관계가 뒤얽힌 냉혹한 자본의 세계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우정이 살아있는 세계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수화의 그림들 속에서 가난의 마음이 지나간 흔적들을 본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서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그림들이 아름다우며 명랑하기를 바란다. 또한 그것들이 새로운 세상과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배반하는,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적 좌절과 실패에서 오는 설움과 한의 감정에 매몰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슬픔과 결핍의 세계 그 자체에 머물지 않은, 신명과 결합된 환상적이고 심미적인 그림들을 꿈꾼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의 그런 간절한 소망의 결정판은 한국일보사가 침체된 한국미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주최한 공모전에 젊은 작가나 제자들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응모했다가 대상을 수상한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침묵하는 것도 아닌' 그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한 이 그림 속에서 그는 가시성과 형상성의 시선을 거둬들일 때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나는, 거대한 침묵의 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침묵하지 않았던 세계. 엄밀히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아닌’ 그 어떤 세계를 보여준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비가시성의 색점들을 통해, 더 많은 얘기와 사연들을 품어 안은 깊은 심연의 바다를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변신들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낯선 세계의 자극과 충격을 통해서 였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들이 익숙하고 포근하며 친숙한 고향으로부터의 가출 또는 탈출을 통해서 였다. 눈에 보이는 사물 대신 그 이면의 본질적인 특징에 주목하고자 했던 칸딘스키와 기하학적 추상을 선보인 몬드리안, 색만으로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루이스(Morris Rouis) 등 색면 화가들과 액션 페인팅으로 널리 알려진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그리고 특히 그가 붓 대신 스펀지를 이용한 초현실주의 색면화로 유명한 라투비아 출생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등과의 만남을 통해서 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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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망향(望鄕)의 작가이면서도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망향(忘鄕)의 작가 수화 김환기에게 우리가 남긴 유산은 바로 그것이리라. 그는 가장 멀고 긴 우회로를 통해, 가장 풍부하고도 깊은 고향의 이미지를 재창조하는데 성공했다. 지역과 인종, 계층과 국적,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지닌 모든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아방가르드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수시로 이성과 의식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그러나 영원히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캄캄한 무의식. 애써 감추고 억압하려 했던 것들과 정면대결을 통해 자신의 고향 바다를 우주적 고향으로 승화시켜갔다. 허이데거의 말대로 “고향을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낯선 타자들”, 즉 서양 현대 미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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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수화 김환기가 멀고 낯선 이국땅에서 뜻밖에 발견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조형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서구 추상미술과의 접촉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는 노자적 침묵의 세계였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배후에 숨어 가려진 장자적 허정(虛靜)의 세계였다. 무궁한 생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여백. 이미지를 넘어선 이미지(象外之象)와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것을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그림 속에서 사라진 형상 대신 등장한 무수한 그의 색점들에서 본다. 그의 색점들은 구체적 자연에 의탁하지 않고도 뭔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직관과 감응의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외물(外物)에 끌려 다니거나 현혹되는 것을 경계했던 동아시아들의 삶의 태도. 굳이 형상을 그리지 않고도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수 없다는 불교적인 침묵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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