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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4]

<곽재구의 여자도 여행 4>


교문을 나와 마을 안길로 들어섭니다. 다섯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대동 마을 초기 입도주인 초계 최씨들의 비석입니다. 예전에는 뻘밭에서 키조개를 밟고 다녔지. 이젠 전설이 되었어. 6월까지 낙지통발을 놓고, 여름철엔 새우 그물을 치고, 9월이 되면 전어를 잡아 어찌어찌들 살아가지. 배운 게 이 짓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어. 한 노인의 얘기를 들으며 추녀가 낮은 동네 골목길을 빠져 나갑니다. 동네 안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군요. 마당에 녹슨 종탑이 서 있는데 종의 끈이 탑에 묶여 있습니다. 나는 끈을 풀고 몇 차례 흔들어 봅니다. 땡그랑 땡그랑 작은 섬마을 교회의 오래 묵은 종소리는 퍽 듣기 좋습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급히 나와 왜 종을 치요? 하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종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씩 웃었더니 별소리 없이 그냥 들어가시는군요.



마을을 벗어나 언덕바지에 이르면 호젓한 능선길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좌우에 아름다운 여자만 바다와 섬들의 풍광을 거느린 길이지요. 길을 곧장 걸으면 마파지 마을에 이르게 됩니다. 천천히 천천히 햇볕을 밟으며 걷습니다. 늦은 인동초 꽃들이 피어 있고 산딸기들이 붉게 익은 길입니다.
억새와 옥수수 밭 사이 원고지 한 장만한 작은 백사장들이 펼쳐집니다. 검은 모래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해안선들. 이 아름다운 길의 존재를 아는 이도 여자도 사람들 외에는 없겠지요. 당신, 혹 여자도에 들르거든 꼭 이 길을 걸으세요. 세쟌느였던가요. 예술은 근본적으로 눈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는.


마파지 마을 초입에 이르렀습니다. 영화 마파도와 마을 이름이 꼭 닮아있군요. 여름철에 부는 마파바람(남풍)이 하도 거세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군요. 나는 잠시 김상남씨 집 앞에 걸음을 멈춥니다. 한 번도 이승의 거리에서 만난 적이 없는 그이의 이름이 문패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꼭 그이를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군요. 새집 때문입니다. 그이의 집 대문 곁에 아주 오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나무의 패인 살점들을 집주인이 정성껏 시멘트로 메워주었군요. 그 나무 위에 새집 하나가 올려 있는데 그 새집에 조성청심(鳥聲淸心)이라는 네 글자가 단정히 쓰여 있습니다.


그 섬에서 세상 근심 끊는 하룻밤 생각으로 가슴이 쿵쿵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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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에 맑아지는 마음이여! 집주인의 정성껏 새긴 마음의 글귀 하나가 이십 수년의 기다림 끝에 이 섬을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줍니다. 집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창호 바른 문 안에는 몇 사람이 모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김상남씨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지만 이내 걸음을 돌립니다. 언젠가 다시 내가 이 섬을 찾을 때 그의 얼굴 또한 꿈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새집을 봅니다. 나무 위에 뭇새들의 울음소리가 떨어집니다. 조성청심. . . 오랜 세월을 기다려 내가 이 섬에 온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자도에는 134세대 350명쯤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남자 186명, 여자 170명이라는 숫자가 출장소의 기록에 남아 있군요. 적어도 이 섬이 여자들만 살아가는 섬은 아닌 것입니다. 여자도(汝自島). 인근 무인도까지를 합친 섬의 모습이 汝자 모양을 따라 위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외딴 섬이라는 뜻에서 自자를 붙여 여자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군요.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어디서 하룻밤을 묵을까, 생각하는 것은 길 떠난 자만의 특권이지요.



별을 보고 소쩍새 울음소리를 밤새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더없이 좋겠지요. 하늘과 바다의 빛이 한없이 푸른섬. 바람과 파도의 음악이 고립된 만안의 어둠들을 조용히 달래주는 섬. 여자와 남자들이 여전히 삶과 사랑의 이야기들을 써내고 있는 섬. 그 섬에서의 세상 근심 끊는 하룻밤 생각으로 가슴이 쿵쿵 뜁니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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