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민기자
농협중앙회가 직접적인 인사권한이 없음에도 지배구조를 이용해 농협은행 등 계열사 인사에 개입한 정황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기소된 지준섭 농협중앙회 부회장은 중앙회 의견을 원활히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은행 인사부장을 교체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에 따르면 일부 인사청탁 민원이 받아들여지면서 실제 인사안이 변경되기도 했다. 지 부회장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비서를 통해 휴대전화를 파손하는 등 증거인멸 혐의도 받고 있다.
13일 법무부가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지 부회장 공소장에 따르면 검찰은 지 부회장을 업무방해·증거인멸교사·증거은닉교사 혐의로 지난해 10월 불구속 기소했다. 지 부회장은 농협은행에 대한 인사권한이 없음에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특정 인사를 대출 심사 부서 부장으로 임명하라고 위력을 행사해 농협은행의 인사안을 변경하도록 한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농협의 지배구조상 농협중앙회가 농협금융지주 계열사 인사업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며, 농협중앙회장 등 고위직 임원들이 인사에 개입해 왔다고 지적했다. 농협중앙회는 농협금융지주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으며, 농협금융지주는 농협은행 등을 자회사로 두고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검찰은 "농협중앙회는 농협은행장 선임에 대한 실질적 관여 권한과 자회사 업무 지도·감독권, 인사 교류 제도 등을 통해 농협은행 인사업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중앙회장이나 부회장 등 고위직 임원들은 친분이 있거나 내·외부 인사청탁이 들어온 계열사 인사 대상자를 '특담(특별상담)' 대상자로 분류해 중앙회 계열사에 대한 인사권한이 없는 중앙회 인사팀에 대상자 희망 부서를 전달했다. 중앙회 인사팀은 하달받은 '특담'을 취합·정리해 해당 계열사 인사부에 전달하고, 이를 인사안 작성 과정에 반영하도록 요구했으며 반영되지 않을 경우 재차 반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 부회장은 중앙회의 인사 관련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은행 인사부장 교체를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농협은행 2025년 정기인사를 앞두고 농협중앙회 의견을 원활히 반영하기 위해 이성희 전 농협중앙회장 재임 시 임명된 인사부장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검찰은 "(지 부회장이) 이석용 전 농협은행장에게 인사부장을 교체하는 것이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의 의견이라고 전달했고 이 전 행장은 인사부장을 피고인이 요구한 인사로 교체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농협은행 인사팀은 공소장에서 "지 부회장이 자신의 측근을 인사부장으로 발령하기 위해 인사부장을 교체했으며, 그 과정에서 농협은행장이 아무런 역할을 못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지 부회장은 인사청탁을 받고 이를 실제 농협은행 인사에 반영하도록 중앙회 인사팀 등에 지시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지역 언론사 사주 지위를 이용해 농협은행으로부터 부당대출을 받은 혐의로 같은 재판에 넘겨진 한상권 서영홀딩스 회장으로부터 인사청탁을 받았다. 청탁 대상은 해당 대출 심사를 담당했던 당시 농협은행 기업개선부장 A씨였다.
검찰에 따르면 한 회장은 2024년 3월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교류가 없던 지 부회장에게 '강호동 중앙회장의 비위 제보를 받았으며 기사화를 막고 있다'며 만남을 요구했다. 지 부회장은 해당 제보가 공론화될 가능성을 우려해 한 회장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판단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한 회장은 부당대출 기한 연장 등 편의를 얻기 위해 은행 부행장 등을 대동해 A씨와 수차례 골프 모임을 가지며 지 부회장과의 친분을 과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A씨가 CIB심사부장으로 이동을 희망하자 한 회장이 지 부회장에게 인사청탁을 했다고 공소장에 적시했다. 지 부회장은 2024년 11월 A씨의 이름과 희망 보직인 CIB심사부장이 적힌 메모지를 중앙회 인사팀장에게 전달하며 이를 농협은행 인사팀에 '특담'으로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농협은행 인사팀은 정기 인사 방침에 따라 '현직 부서장에서 2년 이상 근무 후 타 부서 이동' 원칙을 적용해, 해당 부서에서 1년만 근무한 A씨의 보직 이동을 제외한 인사안을 마련하고 이 전 행장의 승인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그러나 이를 보고받은 지 부회장은 '특담' 반영을 요구했고, 은행 인사팀은 A씨를 CIB심사부장 2순위 후보군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인사안을 수정했다. 이후 지 부회장은 중앙회 인사팀을 통해 추가 조정을 지시했고, 결국 은행 인사팀장은 이를 반영해 인사안을 변경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이 12일 국회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현민 기자 kimhyun81@
지 부회장은 한 회장 관련 수사가 진행되자 해당 수사가 자신에게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해 비서를 시켜 휴대전화를 교체하고 폐기하도록 한 혐의도 받고 있다. 비서는 지 부회장의 휴대전화를 보관하다가 망치로 부수고 물을 뿌린 뒤 쓰레기통에 버린 것으로 조사됐다. 또 휴대전화 소재를 묻는 검찰 조사에서 실제 폐기 장소와 다른 장소를 진술하도록 지시하는 등 증거은닉을 교사한 혐의도 포함됐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는 지난해 10월 한 회장과 임직원 3명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횡령 혐의로, 지 부회장을 업무방해 등 혐의로 각각 불구속 기소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는 지난달 18일 공판준비기일을 열었으며, 오는 3월5일 두 번째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할 예정이다.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이번 사건은 특정 개인의 일탈로만 볼 사안이 아니라 '특담'이라는 비공식 경로를 통해 중앙회가 계열사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며 "인사 권한과 책임이 분리되지 않은 지배구조에서는 내부통제 역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농협 금융계열사의 인사 독립성과 책임성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지배구조 전반을 점검하고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