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필기자
34세에 사업에 뛰어들어 50년을 한길로 걸었다. 고(故)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1941~2025)은 자원 빈국 대한민국에서 세계 1위 제련기업을 일군 '도전의 상징'이었다. 1974년 창립 이후 반세기 동안 그는 단 한 번의 우회도 없이 '기본'과 '정도(正道)'를 믿었다.
1973년 미국 컬럼비아대 MBA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영풍광업에서 재무와 회계 업무를 맡았다. 8개월가량이 지난 어느 날,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나라 전체가 새 산업 기반을 세우려던 시기 그는 아연과 연(鉛)을 제련하는 사업을 제안받았다. 아무도 해본 적 없는 산업이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망설이지 않았다.
고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고려아연 제공
기술도, 자금도, 경험도 없는 창업이었다. 그는 금융회사와 정부 관계자를 수없이 찾아다니며 사업의 타당성을 설득했다. 결국 1974년 8월 1일 단독 법인 '고려아연'을 세웠다. 이후 그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를 직접 찾아가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IFC는 700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그는 "4500만 달러로 가능하다"며 맞섰다. 자본과 부채 비율도 기존의 6대4에서 7대3으로 유리하게 바꿨다. IFC가 1300만 달러를 대출하고 4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당시 IFC가 투자한 민간기업 중 최대 규모였다.
최 명예회장은 건설 방식에서도 관행을 거부했다. 대형 건설사에 턴키(일괄수주)로 맡기지 않고, 자재 구매부터 공정 관리까지 직접 수행했다. "우리 손으로 세운 제련소여야 진짜 우리 기술이 된다"는 믿음이었다. 공사비는 예산보다 2500만 달러가 절감됐고, 완공 후 500만 달러가 남았다. 온산의 허허벌판에 세워진 제련소는 그렇게 '온산의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
그의 경영철학은 부친인 최기호 초대 회장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손에 쥔 재산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머리에 든 재산은 결코 잃지 않는다." 배움의 중요성과 자기 성장의 가치를 강조한 그 말은 평생의 좌우명이 됐다. 그는 기업을 사람에 비유했다. "기업이 성장을 멈춘다는 건 사람으로 치면 죽는 것이다. 노화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최 명예회장은 생전에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 조금씩 발전하면 큰 개혁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거창한 구호보다 매일의 성실함을 믿었던 경영자였다. 그가 세운 온산제련소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던 해외 제련소들을 추월했고, '비철금속 코리아'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의 도전은 단지 한 기업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련산업을 '공해 산업'에서 '친환경 산업'으로 바꾼 기술혁신, IFC 투자유치를 통한 글로벌 신뢰 확보, 그리고 "사람이 중심"이라는 인사 철학은 오늘날 한국 제조업 경영의 뿌리로 자리 잡았다. 최 명예회장이 남긴 말 한 줄은 여전히 고려아연의 현장 벽면에 적혀 있다. "도전은 멈춰서는 순간 사라진다. 변화는 기업이 숨 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