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많이 생산하고 쉼 없이 일하는 게 기계의 능력인 반면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창작력과 창의성이라는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이런 도전에 어떻게 응전해야 하는지가 오늘날 인류에게 부여된 가장 큰 고민이자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랜드의 의미를 해독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최장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엘레멘트컴퍼니 대표)는 창작과 AI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브랜드의 자산을 평가하고 브랜드의 이름을 만드는 동시에 시각적인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이르기까지, '브랜딩-비즈니스'의 전 과정을 설계하고 숨결을 불어넣는 그는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정체성, 인간만의 매력을 고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i>-언어학을 전공하셨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챗GPT가 글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챗GPT가 언어를 실제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i>
▲현대 언어 이론으로는 챗GPT의 작동 원리를 완전히 해독할 수 없습니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를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봤는데, 그의 이론은 이미 오래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정말 이해가 이루어지고,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모델에는 인코딩과 디코딩 과정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이해한 후에, 즉 디코딩하고, 다시 다른 방식으로 인코딩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어 하나가 어떠한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그 의미가 과거의 경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를 세 가지 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저자의 의미, 둘째 텍스트 자체에 내재된 의미, 셋째 독자가 해석할 수 있는 의미입니다. 내가 의도한 의미와 상대방이 해석한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챗GPT와의 상호작용도 이와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GPT가 언어를 이해하는지 못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i>-브랜딩 작업에 철학과 언어학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궁금합니다.</i>
▲세미오틱스, 구조주의 언어학, 그리고 철학적 개념들을 브랜딩 작업에 적용하는 편입니다. 대부분 인문학을 적용한다고 하면 특정 학자의 이름이나 이론을 직접 사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영학에서는 보통 3C나 SWOT 분석 같은 도식만 사용해왔습니다. 반면 저는 인문학적 개념의 시퀀스를 브랜드 경영에 적용하거나 칸트의 12범주 같은 다양한 스키마를 활용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경영학적 접근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인문학적 도식을 통해 브랜드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더욱 차별화된 전략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이 고객사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브랜딩을 가능하게 합니다.
<i>-브랜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있는 개념을 잘 표현하는 역할을 하나요,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는 것인가요? 만약 새로운 개념을 심어줄 수 있다면 이것이 인지적 바이러스처럼 작용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i>
▲브랜드의 역할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우선, 기존에 있는 개념을 잘 정리해주는 것만으로도 기업 가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여러개인 경우 회사 내에서도 임직원들이 그 이해도가 낮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하고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것이 브랜드의 첫 번째 역할입니다.
둘째, 브랜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주입하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마차 시대의 채찍 비즈니스가 있다면, 그들은 더 나은 채찍을 만드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연기관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더 나은 채찍은 쓸모없어졌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에너지 촉매업'으로 재정의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상상했다면,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 비즈니스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주입하는 방식은 마치 인지적 바이러스처럼 작용하여, 기업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고 변화에 적응하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브랜드는 기존의 개념을 명확히 정리해주는 역할과, 새로운 개념을 주입하여 기업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게 가능한 건 의미론적인 콘텍스트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이 빨리 달린다'는 개념에서 '에너지', '퍼실리테이팅' 등의 의미론적 코드를 공유하여 의미론적 유사성을 기반으로 확장을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GPT가 입력된 콘텍스트 내에서 의미를 확장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브랜드의 역할은 이러한 의미와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정의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의미론적 콘텍스트를 기반으로 브랜드의 본질을 재정의하고 이를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이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i>-개인 브랜딩 또한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 브랜딩과 개인 브랜딩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또한 개인 브랜딩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요?</i>
▲기업 브랜딩과 개인 브랜딩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 의식에 있습니다. 기업 브랜딩은 자본 위주의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는 소비자 친화적인 메시지를 내세우지만, 결국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 개인 브랜딩은 목적이 다양하고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마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개인 브랜딩은 다소 복잡한 문제입니다.
AI가 만든 예술과 사람이 만든 예술의 차이에 대해 질문해주셨는데, 이 주제는 발신자에 대한 분석과 연결됩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기계가 만든 결과물이 인간이 만든 것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지만, 저는 중요한 점은 발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셀프 브랜딩도 결국 발신자를 브랜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호학자 알기르다스 그레마스는 민담의 구조를 분석하며 발신자, 수신자, 그리고 메시지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도 마찬가지로, 메시지는 특정 주체의 지향을 담고 있으며, 대립자와 조력자가 존재합니다. AI가 만든 예술과 사람이 만든 예술의 차이는 발신자의 의도와 배경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발신자의 역할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AI가 만든 예술을 인간이 진정한 예술로 느낄 수 있을까요? AI는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없기에, AI 예술가가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i>
▲네, 동의합니다. AI에는 개인적 특징과 고통, 즉 파토스(pathos)가 없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장하며, 그 과정이 예술에 담깁니다. 반 고흐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고통과 성장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가치는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그 과정과 창작자의 이야기에 있습니다. 쉽게 만들어진 작품은 저렴하게 여겨지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예술가의 작품은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이대형 감독님이 지난 AHA 4월호 인터뷰에서 언급한 '아우라'라는 개념에 공감합니다. 아우라의 본질은 거리감입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팝스타들도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아우라가 형성됩니다. 내러티브는 정보보다 중요합니다. 정보는 새로울 때만 가치가 있지만, 내러티브는 오랜 전통과 공동체의 지성에 의해 진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짧은 스냅 영상들은 내러티브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AI 창작의 자유가 확장된다고 볼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러한 자유가 혹사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i>-AI가 보편화되는 가까운 미래에, 기업과 개인 그리고 브랜드 등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요? 아니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까요?</i>
▲AI가 브랜드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현업에서, 생산성 관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브랜드를 만들거나 관리하는 데 있어서 AI는 매우 유용합니다. 덕분에 지식을 습득하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I는 단순히 브랜딩뿐만 아니라 전체 커리어 측면에서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킵니다. 브랜드의 개념은 독점성과 배타성, 그리고 최소한의 품질 보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GPT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아직 100% 신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서 보면, AI는 반(反)브랜딩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뤼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빌려 말하면, 개체는 힘을 쌓아가는 과정 그 자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체가 슬픔이라는 낮은 단계의 완전성에서 기쁨이라는 높은 단계의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개체는 슬픔으로 축소되기도, 기쁨으로 확장되기도 하는 거죠. 저는 브랜더로서 개인의 역량 확장에 AI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활용하여 개인 브랜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i>-미래에는 '브랜드 GPT'와 같은 AI 도구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구독료를 내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5초 만에 그 기업에 맞는 완벽한 브랜드 전략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i>
▲네, 가능하다고 봅니다. 반면 이러한 AI 도구의 등장은 오히려 저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AI가 대량 생산된 브랜드 전략을 제공할수록, 고유한 서사와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인간 브랜더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라 봅니다. AI는 서사를 가질 수 없고, 실패와 고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에, AI대비 인간의 차별화는 명확합니다. AI 브랜딩이 보편화될수록 인간 브랜더의 아우라와 파토스가 더 두드러질 것입니다.
자신이 고유한 정체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AI의 등장은 오히려 가치를 높일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일부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AI를 거부할 수도 있지만, 다양성과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하고 이러한 생각이 선행되면 AI와 공존하면서도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i>-AI로 인해 직업적 위기감이 커지다보니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진로와 직업 방향성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 꼭 필요한 소양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i>
▲기계도 언어를 구사하는 시대이죠. 이런 때 인간에게 중요한 소양은 겸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감정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매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한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기르기 위해서는 겸양과 공감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지속적 연대를 통해 이러한 소양을 키워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될 것 같습니다.
<i>최장순 디렉터는?</i>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더로 손꼽힌다. 고려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했고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일상의 빈칸', '기획자의 습관', '본질의 발견', '의미의 발견' 등 기획 및 브랜딩에 대한 철학과 관점을 담은 다양한 책을 써냈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
김혜연 안무가(여니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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