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기자
최근 미국에서는 주택을 담보로 용도의 제한 없이 대출받아 생활비로 쓰거나 주식 시장의 투자자금으로 쓰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주택담보대출의 용도가 제한된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풍경일 것입니다.
미국은 주택담보대출이 두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져 있어 집을 담보로 다양한 형태의 대출이 이뤄지곤 합니다. 미국 주담대 시장에는 크게 주택 매매를 위해 돈을 빌리는 1차 주담대와 주택의 순가치(대출을 제외한 자기 자본)를 담보로 또다시 돈을 빌려주는 2차 주담대 상품이 존재하죠. 통상 미국인들은 주택 매매를 위해 1차 주담대를 받고 가계 자금 용도로 2차 대출을 추가로 받습니다.
이처럼 주택을 담보로 여유자금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높기에 미국에서는 세컨더리 모기지로 불리는 2차 주담대 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돼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어떤 이유로 신용 대출보다 주택을 담보로 한 세컨더리 모기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걸까요?
세컨더리 모기지가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저리로 많은 금액을 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의 개인 신용대출 금리는 우수 신용 등급자 기준 연 10.99%에 달합니다. 신용점수가 600점대 수준의 보통 등급에 해당할 경우 연평균 13.50~15.50%의 금리로 돈을 빌려야 합니다. 반면 세컨더리 모기지의 경우 8%대의 금리로 대출이 가능하죠.
구체적으로는 대출의 종류에 따라 금리에 소폭 차이가 있습니다. 세컨더리 모기지에는 크게 헬록(HELOC·Home Equity Lines Of Credit)과 홈에쿼티론(Home Equity Loan)이 있는데요. 이달 기준 홈에쿼티론과 헬록의 금리는 각각 연평균 8.48%와 8.65%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홈에쿼티론은 고정금리로 한 번에 대출금을 제공하는 상품입니다. 반면 헬록은 변동금리 상품으로, 본인이 대출을 상환하면서 쌓은 자산가치를 담보로 필요한 만큼 현금을 빌려주는 상품이죠. 헬록을 통해 인출한 현금은 자금용도에 구애받지 않고 쓸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초기 10년간은 원금상환이 유예되고, 이자만 내면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다시 돈을 꺼내 쓸 수 있죠. 전액 상환을 할 경우에는 다시 대출할 수 있는 한도가 늘어납니다. 마치 신용카드 같은 개념이죠.
미국인들은 헬록이 신용대출에 비해 낮은 금리가 낮다는 장점을 이용해 주택 리모델링을 해야 하거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겼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 이후 미국의 주택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차입자들의 순자산가치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헬록 대출의 붐으로 이어졌죠. 자산가치가 늘어나면서 헬록을 통해 현금을 확보해 이를 생활비나 투자에 활용하려는 이들이 증가한 것입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22년 연간 헬록 이용자 건수는 전년 대비 34%가 증가한 141건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2023년 수치는 공개된 바 없으나 신용정보기관인 트랜스 유니언은 지난 3분기 동안 헬록 계좌 개설 건수가 꾸준히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급등한 것도 헬록 열풍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그간 미국인들은 여유 자금을 확보해야 할 경우 홈에쿼티론이나 헬록과 같은 2차 추가 대출 보다 대환대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는데요. 주택을 구매할 당시 받았던 1차 주담대보다 더 큰 규모의 융자를 새롭게 받아 기존 대출을 상환하고 차액을 여윳돈으로 챙겼던 것이죠. 이렇게 대출 갈아타기를 통해 차액을 챙기는 전략을 '캐시 아웃 리파이낸스(Cash-Out Refinance)'라고 합니다. 저금리 시기에는 이러한 전략으로 많은 현금을 확보할 수 있죠.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의 주담대 금리가 고공행진 하면서 재융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여유자금이 줄어들게 됐습니다. 이달 30년 고정금리 주담대 금리는 6.81%를 기록하며 올해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7월 금리는 5.3%에 불과했습니다. 더 큰 규모의 대출로 갈아탈 경우 상환해야 할 이자 부담이 매우 커진 것입니다. 이에 주택을 담보로 필요한 만큼만 돈을 빼 쓰는 헬록이 더 효율적인 현금 확보전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블룸버그에는 주택 가격이 급등하면서 자산이 불어난 한 부부가 헬록으로 여윳돈을 마련하는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텍사스에 거주하는 로스와 사라 부부는 2018년 56만달러를 주고 샀던 집이 100만달러로 오르면서 헬록을 통해 23만달러를 인출했습니다. 부부는 이 돈으로 임대를 내준 집을 수리하고 아이들의 학자금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세컨더리 모기지 붐이 자칫 금융시장에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나옵니다.
세컨더리 모기지는 후순위 채권이기에, 주택 경매 시 선순위 채권에 대한 변제가 모두 이뤄진 뒤에야 채무를 상환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주택 가격이 하락해 경매 낙찰가격이 1차 주담대보다 적을 경우 은행은 대출 채권을 회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코로나19 당시 웰스파고, JP모건 등 미국 주요 은행들은 실업률 증가, 주택시장의 불안정을 이유로 헬록 신규공급을 중단한 바 있습니다.
주택을 담보로 자금 용도와 구애 없이 대출받을 수 있다는 개념이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는데요. 헬록 열풍이 향후 미국 금융시장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