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보 하루천자]오키나와 만보코스, 문화유산 슈리성 걷기

'비만도시 탈출' 오키나와를 가다<3>
일본 본토와 다른 독특한 양식
정전은 화재로 소실…아픈 오키나와 역사 보여줘

[오키나와= 아시아경제 전진영 기자] 오키나와 여행은 대부분 차로 이뤄지지만, 천천히 걸으며 오키나와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걷기 코스가 있다. 과거 류큐왕국으로 불렸던 오키나와의 독자적인 역사가 담긴 슈리성과 그 인근 지역을 돌아보는 코스다. 주요 장소를 위주로 살피면 1시간 남짓 걸리는 코스로 조용하고 차도가 없어 걷기 매우 적합한 코스다.

슈리성의 모습. 오른쪽에 류큐왕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안내원이 서 있다.

전철 대신 모노레일이 다니는 오키나와에서 슈리성은 이 모노레일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이곳에서 인근 지역을 1시간 정도 걸으면 4km 정도 거리를 거닐어볼 수 있다.

슈리성은 과거 일본과 별개의 독립된 국가였던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의 왕이 거주했던 성이다. 류큐 왕국이 세워진 초기 13세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명확한 축성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사카성 등 대부분의 일본 성이 하얀 벽에 처마를 올린 것이 특징이라면, 슈리성의 건물들은 이와 다르게 오히려 중국의 성들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는 과거 류큐 왕국이 중국, 한국, 일본 사이 중계무역을 통해 번성했기 때문에 나타난 양식이다. 이에 슈리성에서는 흔히 아는 일본의 분위기와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초입에는 예의를 지키는 문이라는 뜻의 '수례문'(守禮門)으로 불리는 빨간 문이 있다. 현판에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고 쓰여 있는데, 글자 자체는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곳은 중국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는 문이었다고 하는데, 왕이 바뀔 경우 책봉사가 인장을 전달해주러 왔다고 한다. 과거에는 일본보다 중국과 더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다.

천천히 오르다 보면 궁궐을 지키는 사자 '시사'를 만날 수 있다. 한국의 해태와 비슷하게 생긴 시사는 오키나와 전설의 동물인데, 모티브는 사자에서 왔다. 학계에서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중국을 통해 건너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사는 집을 지키는 시사, 가게에 있는 시사, 궁을 지키는 시사 등 역할에 따라 모습도 조금씩 다르다. 이곳 슈리성에서는 궁을 지키는 늠름한 궁 시사를 만날 수 있다.

궁 안에는 신전 등 제례를 위한 장소도 보이는데, 이것은 과거 류큐 왕국에 있던 ‘구스쿠’라고 불리던 성들의 특징이다. 슈리성이 단순히 왕궁을 넘어 종교적 역할까지 수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슈리성의 궁궐 시사.

독특한 성의 양식, 그리고 류큐 전통 의상을 입은 안내원들을 마주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슈리성 중심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궁궐 핵심인 정전(正展) 대신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공사 안내판이다. 슈리성의 정전은 현재 전소돼 복원장의 일부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는 오키나와의 안타까운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슈리성은 계속해서 복원과 소실을 반복해왔다. 류큐 왕국 시기에는 왕국 내부의 난으로 성에 화재가 발생했었다. 이후 일본은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시킨 뒤 슈리성에서 국왕을 쫓아내고 군 기지로 썼다. 미국의 오키나와 침략 당시에는 슈리성이 일본군 총사령부로 쓰였고, 결국 1945년 미군 공격을 받아 전소됐다.

이후 류큐 대학 건물로 쓰이는 등 슈리성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가 2019년 1월 겨우 18세기 모습으로 복원이 완료됐다. 그러나 복원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10월 원인 미상의 화재로 정전이 소실됐다.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정전 복원 현장의 모습.

그나마 채 다 타지 않은 기와와 용머리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정전의 크기와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류큐 왕국과 조선이 오랫동안 교류해왔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슈리성이 경복궁 근정전과 닮은 모습이라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더욱 옛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크게 다가온다.

복잡한 감정을 뒤로하고 정상에 오르면 오키나와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멀리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시내가 보이는 이유는 슈리성을 만들 당시 "류큐 왕국이 작은 곳이라는 것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슈리성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시내의 모습.

슈리성을 걸을 때는 오키나와 전통차 '산핀차'도 함께 즐기기를 권한다. 오키나와 편의점이나 음료수 자판기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산핀차는 중국 '재스민차'를 오키나와식으로 발음한 데서 왔다고 한다. 재스민에 일본식으로 녹차를 섞어 걸으면서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다.

삼십 분 남짓 슈리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한적한 일본 마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오키나와예술대학을 거쳐 모노레일 기보역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린다. 곳곳에 자그마한 동네 가게와 가정집이 있어 조용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감성이 물씬 풍긴다.

따뜻한 날씨에 2월부터 마을 곳곳은 벌써 꽃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이 시기부터 '히칸자쿠라'라고 부르는 벚꽃이 핀다. 한국에서 보는 하얀 벚꽃과는 다르게 분홍색을 띠는데, 벚나무 중에서도 가장 빨리 핀다는 ‘캄파눌라타 벚나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와 대만 등 따뜻한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벚꽃이다.

기보역으로 가는 길에 핀 히칸자쿠라.

기보역에서는 모노레일을 타고 다시 나하 시내로 이동할 수 있다. 일본 본토와 언어도 다르게 사용했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번성했던 류큐 왕국. 이곳 오키나와 사람들이 슈리성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이 뿌리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의 빈번한 침략과 전쟁으로 관광지이기 이전 섬의 일상이 모두 애도의 과정이었다는 오키나와. 볼거리와 먹거리 뒤에 남겨진 옛 류큐 왕국을 걸어 보는 것은 또 다른 여행이 될 것 같다.

오키나와= 전진영 기자 jintonic@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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