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고정 관념 깬 배우 윤정희 별세(종합)

문희·남정임과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 열어
여성 배역 다변화 일조, 연기파로 입지 다져
성년후견인 지정, 추가 심리 없이 각하될 듯

영화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 씨가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영화계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온 윤 씨는 이날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배우 윤정희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66년 신인배우 오디션에서 선발돼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 이듬해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을 시작으로 영화 264편에 출연했다. 1968년에만 쉰 편에 출연하며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troika) 시대를 열었다. 트로이카라는 말 그대로 은막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한국영화사 전성기를 견인했다.

인기는 단순히 새로운 얼굴이 주는 신선함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당시 여배우들은 최은희·김지미·조미령로 대변되는 현모양처나 도금봉·윤인자·최지희가 연기한 팜므파탈로 정형화돼 있었다. 윤정희는 문희, 남정임과도 차별화된 지적인 이미지로 고정된 틀을 깼다. '안개(1967)', '장군의 수염(1968)', '독짓는 늙은이(1969)', '위기의 여자(1973)' 등에서 장르와 배역에 얽매이지 않는 색다른 연기를 펼쳤다. 여성 배역 다변화에 일조하며 연기파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일곱 번이나 안았다. 대표작으로는 '신궁(1979)',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손꼽힌다. 마지막 작품은 2010년 이창동 감독과 함께한 '시'다.

고인은 바쁜 연기 활동 중에도 틈틈이 학업을 겸했다. 논문 '한국여배우론'으로 중앙대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73년부터 9년간 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예술학을 공부했다. 그 무렵 파리 레스토랑에서 재회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1976년 결혼해 줄곧 파리에서 지냈다. 사치를 멀리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낭만적인 삶을 살았다. 생전 인터뷰에서 "너무나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항상 부자라고 생각한다. 좋은 친구들이 있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세계 각지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지낸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드문드문 활동하면서도 영화계를 떠나지 않았다. 각종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영역을 넓혔다. 1995년 몬트리올영화제, 2010년 뭄바이영화제, 2006년 디나르영화제·청룡영화상 등에서다. 알츠하이머를 진단받아 배우 활동은 이어갈 수 없었다. 증상은 '시' 촬영 즈음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백 씨는 2019년 인터뷰에서 "긴 대사를 써놓고 읽으면서 연기했다. 그 뒤 영화를 한 편 더 하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함께 읽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상을 받으러 올라가기도 어려웠다"라고 고백했다.

성년후견인은 딸인 백진희 씨였다. 프랑스 법원에 지정을 신청해 승인받았고, 2020년에는 국내 법원에도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다. 성년후견은 질병, 노령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을 위해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해 재산 관리나 신상 보호를 지원하는 제도다. 고인의 동생은 부녀의 방치를 주장하며 성년후견인 지정을 반대했다. 법원은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2심까지 딸 백 씨를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고인 동생이 재차 법원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은 대상자가 사망한 만큼 사건을 추가 심리하지 않고 각하할 전망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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