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모래바람무늬/신정민

아버지는 TV를 켜 놓고 주무셨다

끄면 영락없이 깨셨다

방송 중인 곳에 돌려놓고 다시 눈을 감으셨다

필요했던 소음

먼 옛일이 어제 일보다 분명한 아버지에게

TV는 필요한 소음을 제공하는 훌륭한 기계였다

재미없는 드라마도 필요했다

방송 끝난 화면의 소음 속에 외계에서 오는 신호가 잡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버지가 별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밤하늘 자주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버릇

떠나온 고향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었는데

별과의 접선을 시도하는 줄도 모르고

방송 끝난 TV를 자꾸만 껐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자꾸 작아진다. 자꾸 작아지는 아버지가 자꾸자꾸 실없이 웃는다. 어린애처럼 웃는다. 리모컨을 꼭 쥐고 웃는다. 리모컨을 꼭 쥐고 웃다가 리모컨을 꼭 쥐고 잔다. 등을 둥글게 말고 새근새근 잔다. 거실에서 이불도 없이 혼자 잘도 잔다. 자면서도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 아버지는. 어쩌면 우주선을 타고 저 먼 은하들을 여행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나 별사탕을 사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걸까. 한낮에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아버지가 해사하게 웃는다. 내 늙은 아버지가 꼭 내 아들만 같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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