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침묵/이창수

아버지 참나무 베어다어머니 목욕물 데운다더운물에 찬물 붓는 소리더운물에 손 담그는 소리다시 한 바가지 찬물 붓는 소리손으로 물 휘젓는 소리치매 앓는 어머니 안아다아버지가 목욕시키는데머리 감기는 소리물 끼얹는 소리침묵은 참나무보다 무겁고산불 지나간 자리연둣빛 고사리 돋는 소리
■참 좋은 시는 시 바깥의 모든 말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시가 그렇다. 도대체 이 시에다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겠는가. 한 행 한 행 더해질 때마다 경건해지고 웅숭깊어지는 소리들이 마침내 도달한 곳은 "참나무보다" 무거운 "침묵"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침묵"은 필멸할 생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장엄한 적멸이면서 동시에 "연둣빛 고사리 돋는 소리"를 품고 있다. 소리로 시작했으되 소리를 지워 궁극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니 궁극에 궁극을 더한 셈이다. 한마디로 지극한 시다.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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