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 객원기자
6월 2일 도이치 방송교향악단(지휘 피에타리 잉키넨)과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바딤 레핀은 자신이 ‘한국’과 깊게 연계됐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동구권과 수교를 맺기 전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와 더불어 ‘소련 3대 신동’으로 한국의 미디어가 대접하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내한하면 매번 키신, 벤게로프와 비교하는 질문이 껄끄럽지만 성실히 답하는 편이다. 삼성 갤럭시 마니아여서 공연 관계자와 안면을 익힐 때 갤럭시의 새 기능을 설명하면서 경계를 허문다.레핀은 1971년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1982년 비에냐프스키 주니어 콩쿠르를 우승하고 1989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1990년대 초에 이미 최정상의 신예 주자로 자리 잡았다. 1989년 독일로 근거를 옮겼고 지금은 모스크바와 고향을 오가며 연주활동을 이어간다. 노보시비르스크에 가면 레핀은 지역 최고의 명사 대접을 받는다. 레핀의 전화 한 통이면 노보시비르스크에선 연주 비자도 일사천리로 해결된다.동향의 라이벌 벤게로프를 가르친 자카르 브론이 레핀의 스승이다. 줄리어드의 고 도로시 딜레이, 뮌헨음대의 안나 추마센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전 원장 김남윤처럼 세계 바이올린 교육의 주류를 지배하는 자카르 브론 문파의 대표 연주자다. 유소년 시절부터 스승이 요구하는 가혹한 수준의 테크닉을 손쉽게 소화하면서 비범한 수재로 주목받았다.그러나 레핀의 저력은 단순한 테크니션에 머물지 않기 위해, 후천적인 정신 수양에 진력하고, 악기에 풍부한 음색을 담아내는 고유의 방법론을 터득한 데 있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테크닉의 향연이 펼쳐지다가, 곧이어 시적 정서가 충만한 연주가 이어지는 장면이 이번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2번에서도 예상된다.바딤 레핀 (c) Gela Megrelidze
예풍을 보면, 체구로 보나 연주 스타일로 보나 구 소련의 거장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74)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안정감과 집중력, 기세에서 오히스트라흐를 닮았다는 평가는 유소년 시절부터 이어졌다. 실력 면에서 1990년대 믿음직한 비르투오조 바이올린의 기준은 벤게로프와 레핀이었다.그러나 힘차게 달리는 범선 같던 레핀의 항해가 2000년대 초반 행로를 잃었다. 유럽 정론지들의 리뷰에서 ‘레핀답지 않은 실수’란 표현이 하나 둘 실리더니 집중력과 완성도면에서 라이벌 벤게로프와 확연히 비교되는 결과가 반복됐다. 기교는 현란하지만 감동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한동안 이어졌고 2001년엔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듀오 내한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취소가 됐다. 2006년 KBS 교향악단 협연도 연주 성과는 부진했다.2000년대 초에 시작된 이혼 과정이 계속 늘어지면서 의욕과 자신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음악에도 분명히 악영향을 미쳤다. 소속 레이블 에라토가 전속 계약을 해지했고 연주 취소도 잦아졌다. 그래도 레핀의 재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정신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스위치가 켜지듯 바로 돌아올 것이란 전망이 바이올린 전문가 사이에선 지배적이었다.그리고 실제로 2010년대 들어 레핀은 연주에 다시 활력을 찾았다. 쇄신의 계기도 로맨스였다. 2008년 겨울, 레핀은 런던 심포니 공연으로 도쿄에 왔고 같은 시기,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백조의 호수’ 공연을 도쿄에 하는 동안 두 사람이 서로의 공연장을 찾는다는 풍문이 퍼졌다. 2010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이 자하로바의 공연 취소를 알리면서 레핀-자하로바의 결혼과 더불어 놀랍게도 출산 예정까지 알렸다. 가히 클래식과 발레에서 최정상 아티스트의 결합이었다.레핀은 자하로바와 처음 만난 도쿄 데이트도 한국과 관련이 돼서 성공했다고 밝힌다. 자하로바에 데이트를 청하면서 롯본기의 고급 한정식으로 안내했는데 음식이 맛있어서 대화도 무르익었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한식을 즐겨서 자하로바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공연으로 뉴욕에 있을 때 레핀은 한인 밀집 지역 플러싱으로 그녀를 데려가 한식을 권했다.서울시향 공연을 함께 한 지휘자 정명훈, 2015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에 대해 대외적으로 전폭적인 지지의 입장을 표한다. 또한 본인이 예술감독을 맡은 트랜스 시베리아 축제에도 올해 세종 솔로이스츠를 초청할 만큼 레핀의 한국사랑은 실질적이다. 그래서 레핀에게 서울은 단순히 연주료를 받고 스치듯 지나치는 도시가 아니라, 자신의 음악 역사에 소중한 기억과 우정을 나누고픈 장소다.늘 동심을 유지하는 얼굴로 기억했는데 레핀도 어느덧 오십을 목전에 뒀다. 중년기 레핀의 음악 방향은 조슈아 벨이나 니콜라이 즈나이더처럼 본격 관현악 레퍼토리까지 지휘로 관여하진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선배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처럼 앙상블의 리더 겸 지휘자로 자주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트랜스 시베리아 축제의 행정과 펀딩도 부분적으로 담당할 위치에 있어서 음악적 기량을 전념해서 유지하는 데 마찰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본령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기량이 녹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라도 절대적인 연습 시간 확보가 중요하다.레핀은 연주료로 돈을 벌면 악기 구매에 투자한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처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자신이 독점하겠다는 의욕이 여전히 꿈틀댄다. 지천명에도 명기에 맞는 훌륭한 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겠다는 순수한 마음가짐에서 레핀의 밝은 50대를 기대한다.한정호 객원기자<ⓒ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