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주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서울=연합뉴스) 대한항공 직원과 시민들이 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 촉구 집회에 참석한 모습.
[아시아경제 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면은 '가이 포크스'다. 2006년 동명 만화를 각색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주인공 'V''는 미래 사회를 완전하게 통제하는 정권에 대항한다.그래서일까. 하회탈처럼 웃는 얼굴에 역 팔자 콧수염이 그려진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가이 포크스는 영국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영국 의회 의사당을 폭파시켜 종교개혁을 주도한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테러를 기획하려다 실패했다. 당시 영국 왕실에서는 이날(11월 5일)을 감사절로 정하고 왕의 건재함을 자축하는 불꽃놀이를 열었다.하지만 영국인들은 이날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무리를 지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위기를 모면한 왕을 위해, 또 누군가는 테러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불꽃놀이를 즐겼다.저항을 상징했던 가이 포크스는 동명의 영화가 개봉한 이후 익명의 아이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인터넷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가 그 시발점이다. '어나니머스'는 '익명'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독재 정권에 대한 해킹 공격을 일삼는 이 집단은 이슬람 무장단체인 IS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2015년 '어나니머스'의 회원인 한 남성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유튜브를 통해 IS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어나니머스'가 외계인 신봉설 논란을 빚은 미국 사이언톨로지 교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자 지지자들이 이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이에 앞서 2011년 금융 자본주의에 반대한 뉴욕의 월가 시위에서도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용됐다. 급기야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그해 유행할 할로윈 데이 의상 10개 중 하나로 가이 포크스 가면을 꼽기도 했다.가이 포크스 가면이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다시 등장했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사측의 참여자 색출을 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가면을 쓰고 참석한 것이다. 재벌에 대한 직원들의 저항 집회에서 신분 노출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용된 사례는 처음일 것이다. 다른 재벌가나 중견ㆍ중소기업의 갑질에 저항하는 익명의 상징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보인다. 우리 사회가 아직 가이 포크스의 가면이 더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가면이 필요가 없는 날은 언제쯤일까.정완주 정치사회 담당 선임기자 wjchung@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