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숲과 수첩/박은정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수첩이 하나 있다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숲 속에 흑과 백이 섞여 흐려지고 있었다 숲과 수첩에 대해 매일 메모를 해 둬 오늘은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내일은 전화를 건 사실조차 잊을 수 있도록 검게 다시 나약하게 희게 다시 막막하게 페이지를 넘기면 낯선 페이지가 나타나고 휘갈긴 번호가 휘갈긴 시간들이 휘갈긴 마음이 휘갈긴 망각들이 온통 가득 차도록 숲은 차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눈앞에 보이는 어둠이 지루해지면 잠이 들 테고 잠이 들면 다시 네 꿈을 꿀지도 모르지만 책상은 흔들리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건 허리에 안 좋아 누군가 나를 밀어낸다 저녁에는 눈이 내릴지도 모르고 아니 생각지도 못한 불운이 덮칠지도 모르지만 숲은 검고 나약하고 검고 나약한 것들을 보고 있으면 숲은 젖어 간다 숲이 젖으면 얼굴이 젖어 들고 두 손이 퉁퉁 부을 때까지 눈을 감고 있으면 숲은 수첩이 되고 수첩은 숲이 되어 서로의 몸에 나무를 그려 넣는다 하나의 나무에서 둘의 나무로 바람이 불고 셋의 바람이 부는 쪽으로 개미가 사라지는 오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버림받는 기분을 아니 대답이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혼자 골몰하는 그네가 있다 유년도 없는 두 발이 해가 지도록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강연에서 행한 보르헤스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어떤 시가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이들을 뒤적이다 보면 어느 결에 좋은 시를 만나곤 한다. 이 시가 그렇다. 이 시의 전언은 사실 간단명료하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버림받는 기분을 아니"가 그것이다. 글자들을 따라 중얼중얼거리고 있다 보면 "검고 나약한 것들" 속으로 빨려든다. 그리고 마침내는 "유년도 없는 두 발이 해가 지도록 흔들리고 있"는 "그네"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읽고 다시 읽다 보면 그런 "기분"이 "차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대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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