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시인
판소리 '수궁가(水宮歌)'에 '상좌 다툼'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온갖 짐승들의 자리싸움입니다. 서로 제가 어른이라며 윗자리에 앉겠다고 티격태격하는 형국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노루는 자기가 삼국지의 '조조(曹操)'와 나이가 같다며 나서고, 너구리는 '이태백'과 벗하며 글을 읽었다고 으스댑니다. 멧돼지는 한(漢)무제 때 났다면서, 너구리 나이는 제 손자만도 못하다고 시치미를 뗍니다. 토끼가 튀어나오며 호통을 칩니다. "어라, 이놈들! 나이를 모두 들어보니 내 고손자 나세(나이)만도 못허다." 자신은 구름으로 차일(遮日) 삼고, 푸른 학과 벗하여 신선처럼 살다간 낚시꾼의 시조 '엄자릉(嚴子陵)'과 친구라는 것입니다. 결국 토끼가 상좌를 차지합니다. 토끼 허풍이 다른 짐승들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호랑이가 나타납니다. 토끼가 얼른 비켜 앉으며 호랑이 나이를 묻지요. 벼락처럼 답이 떨어집니다.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자기가 '여와'씨를 도와서 모자라는 하늘 한쪽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나오는 데야, 대적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온갖 짐승들이 꼬리를 감추며, 일제히 엎드립니다. 산중의 왕 나이를 물은 것부터가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급기야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새어나옵니다. "장군님은 어저께 나셨더라도 상좌로 앉으시오." '가년(加年)'이란 단어가 생각납니다. 실제 나이보다 더 올려붙인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과거나 벼슬살이의 연령제한 때문에 생긴 말이지요. 남자들 나이는 가끔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술자리나 논산훈련소 같은 곳에서 은근히 대접을 받고 싶은 축들이 천연덕스럽게 한두 살을 들었다 놓았다 합니다. "형씨는 올해 몇이오?" 묻고 답하는 동안, 묘한 긴장감까지 감돕니다. 화투나 카드놀이판에서 서로의 패를 흘끔거리는 순간의 스릴마저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끗발'싸움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일수록, 서로 꿀리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누가 세상에 먼저 왔는지를 가려 '갑(甲)'의 자리에 서고 싶은 것입니다.
위아래가 분명해지면, 새로운 질서와 서열이 생기고 새 판이 짜이지요. 그런데, '형' 소리 듣는 것보다 더 즐겁고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갑(同甲)'을 만났을 때입니다. "무술생? … 이거 참 반갑소. 나도 개띠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맞잡게 되는 순간입니다. 팽팽하던 기 싸움도 대번에 끝납니다. 같은 해에 세상에 왔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두 사람은 죽마고우가 됩니다. 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살가워집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처음 본 풍경이 같은 까닭입니다. 처음 만난 햇살과 바람의 느낌도, 처음 귀에 들린 노래나 뉴스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는 법도 공부 방식도 같았음은 물론입니다. 화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구구한 주석이 필요 없습니다. 아는 것, 모르는 것이 엇비슷합니다. 겪은 일, 겪지 않은 일이 포개집니다. 먹어본 과자, 못 먹어본 아이스크림이 비슷합니다. 배우, 가수, 운동선수… 알고 모르는 이름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시간의 '알리바이(alibi)'가 쉽게 가려집니다. 언젠가 저는 동갑을 만난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랑바리나바롱나르비못다라까따라마까뿌라냐." 상대의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습니다. "아, 서유기!" 그렇습니다. 그것은 1970년대 어린이방송 라디오연속극에 나오던 손오공의 주문이었습니다. 동시에, 한 시절의 어린이들을 하나로 묶는 암호였습니다. '우랑바리나바롱…'을 줄줄 외거나 알아듣는 이라면, 원숭이나 닭띠 혹은 개나 돼지띠들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대표적인 '베이비부머' 들이지요. 제 친구들도 그 안에 다 들어갑니다. 대부분은 '개'들입니다. 저처럼 일곱 살에 초등학생이 된 '돼지'들도 더러 있지요. 재수, 삼수를 거친 대학 친구들은 '닭'이나 '원숭이'입니다. 어제는 돼지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시인이 된 '기해생(己亥生)' 친구 넷입니다. '등단 삼십년'을 자축하는 자리에, 희수(喜壽)를 맞은 문단 어른도 모셨지요. 오십년 동안 시를 쓰신 분입니다. 동갑의 돼지들이 효도를 겸해 제법 의미 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내일은 고등학교 동창 대여섯을 만납니다. 사흘 뒤엔 '갑년(甲年)'의 아침을 맞게 될 친구들입니다. 원숭이와 닭들의 해가 가고, 이제 개의 해가 옵니다. 제 동갑의 해도 뒤를 따라오고 있겠지요.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띠 동갑'이 그리워집니다. 을해생(乙亥生), 제 어머니입니다. 같은 띠가 아니어도 어머니는 아들딸과 동갑입니다. 자식들이 지나온 세월과 옷과 밥과 일과 사랑을, 친구처럼 아는 까닭입니다. 동갑을 잃은 한해가 지나갑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정유년'을 지납니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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