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사진=영화 '마리앙투아네트' 장면 캡쳐)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18~19세기 유럽 궁정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반드시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가면 무도회' 장면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가면을 쓰고 파트너와 춤을 추는 무도회는 화려했던 과거 절대왕정의 상징적인 장면처럼 흔히 묘사된다. 가면을 쓴 파트너와 비밀리에 만나는 밀회장면도 주요한 클리셰 중 하나다. 하지만 실제 가면은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무도회에서 쓰기 위해 탄생한 물건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가면무도회는 15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탈리아에서 가면이 성행하게 된 것은 끔찍한 질병이었던 '흑사병'을 이겨낸 이후부터였다. 흑사병이 공기로부터 전염된다고 믿었던 중세시대였기에 일종의 방독면 개념으로 가면을 썼던 것.중세시대, 흑사병을 진찰하던 의사들이 썼다는 가면. 후대에 이르러 가면무도회의 주요 가면 중 하나로 정착됐다.(사진=위키피디아)
특히 당시 학자들은 흑사병의 주요 원인을 '냄새'로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기괴한 모양의 가면을 쓰고 그 밑에 향수통을 설치한 방독마스크가 유행했다. 물론 한참 잘못된 상식이었음은 수백년 뒤에야 밝혀지지만 흑사병 대란이 끝난 뒤, 이탈리아에서는 가면 자체를 흑사병을 이겨낸 일종의 상징으로 보고 이후 가면무도회 등 가면 관련 축제가 성행했다. 이것이 르네상스 문화 중 하나로 전 유럽에 퍼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가면무도회로 발전한 셈이다. 고대 전쟁터에서도 가면, 즉 마스크는 주로 화학전에 대비하기 위한 방독면으로서 기능을 해왔다. 고대 중동에서는 유황 연기를 바람에 날려 화학전을 펼쳤으며 재나 석회, 고춧가루 등도 독가스와 비슷하게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당시 조선군이 석회가루를 담은 자루를 일시에 터뜨려 일본군을 막았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생석회는 수분과 접촉하면 물기를 흡수하며 고열을 내기 때문인데, 사람의 눈이나 호흡기에 들어가면 상당한 통증을 일으킨다.2차 대전 당시 나온 방독면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후 현대적 개념의 방독면은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독일군이 1차대전 당시 벨기에 전선에서 염소가스를 실전 투입한 이후 대규모 군사적 운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 말에 각종 독가스가 개발이 된 상태였지만 1899년, 당시 국제법으로 독가스는 사용이 금지돼 있었다. 이것을 독일군이 깨버리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량 살상용 무기로 정착돼버렸다. 1차 대전 당시 사용된 포탄 중 30% 가량이 가스탄이나 화학탄으로 구성됐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2차 대전부터 신경 작용제 등 현대전에도 치명적으로 사용하는 화학무기들이 개발되면서 방독면 역시 발전을 거듭했다. 사람이 쓰는 원통형 방독면 외에도 2차 대전 당시까지 군량수송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던 군마, 그리고 군견용까지 개발됐다.지난 2014년,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 당시 등장했던 생수통으로 만든 방독면(사진=위키피디아)
현대에도 화학무기, 독가스는 소위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 불리며 북한을 비롯한 후진국들이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학살 당시 사용된 독가스의 위력이 확실히 입증되면서 대량살상무기로 가격이 저렴한 독가스가 전략무기로 많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요원 암살 등에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난 3월, 북한의 '김정남 독살사건'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VX가스'가 대표적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화학전에서 방독면은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오염지역을 통과할 때 가장 필요한 도구 중 하나가 됐다. 방독면에 부착된 정화통은 오염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2시간 정도까지 정화가 가능하다고 알려져있다. 보통 1~3개 정도 지급되는 정화통을 이용해 신속히 오염지역에서 벗어난 뒤, 제독을 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인 것. 현대에는 용도에 따라 유독가스에 대비하기 위한 방독면과 화재 시 사용하는 방독면으로 나뉘게 됐다. 유독가스에 대비하는 방독면도 산소농도가 18% 이하인 환경에서는 오히려 질식사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 중인 지역에서 화학전이 개시되면 공기호흡기도 함께 필요하다. 화재현장에서도 방독면만 찾아서 썼다고 안심할 순 없는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