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영화읽기]봉준호답지 않은 무딘 현실 비판, 지나친 낙관은 아닐까

영화 '옥자' 스틸 컷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옥자'의 주제는 단순하다. 다국적 식품산업의 비윤리성에 대한 저항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독재를 비판한다. 봉준호 감독(48)은 동물과의 교감으로 정서적 감흥을 유도한다. 미자(안서현)와 유전자변형 슈퍼 암퇘지인 옥자의 사랑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10년간 함께 자라며 친구이자 가족이 된다. '옥자'는 어머니 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영화 '아가씨(2016년)'에서 숙희(김태리)가 하녀로 위장하려고 사용하는 가명도 옥자의 일본식 발음인 타마코다. 너무 흔해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돋보이기 어렵다. 옥자는 그렇지 않다.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며 미자의 이야기를 알아듣는다. 명석한 판단과 뛰어난 순발력으로 낭떠러지에 매달린 미자를 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옥자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에 납치된 뒤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미자가 초능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몸을 던져 강화유리벽을 부수는가 하면, 달리는 트럭에 매달려 옥자를 쫓는다. 봉 감독은 "만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액션을 보여준다. 코난의 여자아이 버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미자의 활약 속에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옥자는 봉 감독의 전작들과 궤도가 다르다.

사진출처=영화 '옥자' 스틸 컷, 봉준호 감독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괴물(2006년)'에서 강두(송강호) 등 오랜만에 모인 가족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현서(고아성)를 구하지 못한다. 괴물의 힘을 감당하지도 못하지만,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살인의 추억(2003년)'에서는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지만 진범을 잡지 못한다. 범인도 영악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시대적 아픔이 더 큰 걸림돌이다. 옥자에서 이런 충돌은 기대할 수 없다. 슈퍼돼지를 만든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지나치게 무능하다. 미자는 제이(폴 다노)가 이끄는 비밀 동물보호단체 ALF로부터 도움도 받는다. 그래서 옥자와 재회하는 장면이 애틋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독재를 향한 비판도 날이 무디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10년 이상 공을 들여 키운 슈퍼돼지를 겨우 금 몇 돈과 맞바꾸고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준다. 어찌 보면 미자와 옥자의 관계를 이해해주는 착한 기업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 대다수는 '앞으로 고기를 먹기가 불편해질 것 같다'고 토로한다. 미자와 옥자의 사랑 때문이 아니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공장에서 고기가 되어 가는 슈퍼돼지 수백 마리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후유증이다. 봉 감독은 "옥자를 준비하면서 거대한 도살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하루에 소 5000마리를 도살한다. 옥자 후반부를 보고 무섭고 충격적이라는 분이 있지만, 실제 본 것은 영화보다 스무 배나 서른 배 끔찍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퀀스는 영화에 그다지 득이 되지 않는다. 끔찍한 장면이 영화의 주제의식도 사랑 이야기도 모두 집어삼켜버렸다.

영화 '옥자' 스틸 컷

옥자의 주제나 이야기는 마리 루이즈 드 라 라메의 소설 '플랜더스의 개'와 비슷하다. 우유를 배달하는 넬로는 버림받은 개 파트라슈를 집으로 데려가 보살핀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지만 보고 싶은 그림을 볼 엄두도 못 낼 만큼 가난하다. 방앗간에 불을 지른 범인으로 몰려 일거리마저 잃는다. 결국 집에서 쫓겨나 성당 안에서 파트라슈를 껴안고 얼어 죽는다. 넬로는 눈을 감기 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를 본다. "드디어 봤어. 하느님 이제 됐어요." 루벤스는 넬로처럼 가난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궁정화가의 문을 열었다. 플랜더스는 루벤스가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한 곳이다. 대서양무역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물류와 금융 거래가 활발했다. 그렇게 부를 쌓아올린 신흥 상인가문들의 지지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옥자에서 미란도 코퍼레이션도 슈퍼돼지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연다. 그런데 미자와 옥자는 넬로와 파트라슈처럼 희생되지 않는다. 두메산골로 돌아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지나치게 순진하고 낙관적인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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